2016.07.02


이 날은 개인적인 덕질을 많이 한 날이어서, 이번 러시아 여행 전체가 모두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에 많이 남는 날이 되었다.



슈퍼에서 요거트를 사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여기는 요거트나 치즈 등 유제품이 비싸지도 않고 다양한 것 같다. 나는 우유는 마시지 못하는데 우유 특유의 냄새가 제거된 유제품은 또 좋아한다. 이번 여행에서 맛있는 요거트를 많이 마셔서 좋았다.




1 숙소

2 중간에 들른 H&M

3 정치사박물관

4 '밥집'




길을 걷는다. 원래는 넵스키 대로에서 강을 따라 조금 걸으면 나오는 '음악 박물관'에 갈 예정이었다. 예전에 궁전으로 쓰이던 곳이어서 건물도 매우 아름답고, 지금은 고악기가 전시되어 있고 음악회가 열리거나 하는 장소이다. 역시 러시아에 왔으면 이런 곳을 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 9시경의 길. 사진을 찍은 것은 미니스트리(Ministry)의 콘서트 포스터 때문이었다. 미니스트리는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터줏대감 같은 1인 밴드인데... 한국에선 너무나 소수의 취향인데 여기선 이렇게 포스터도 붙어 있고 공연도 오고, 인더스트리얼 메탈 같은 걸 듣는 사람들이 여긴 좀더 많은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밴드는 왠지 유럽 밴드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찾아보니 미국 출신이군.




지금까지 여행에서 하도 걸은 탓에 이 날은 아침에 나오자마자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말, 정말로 조금만 걸으려 했는데... 박물관까지 갈 마땅할 버스를 찾지 못한 탓에 박물관까지 또 걸었다. 게다가 박물관 개장 시간을 착각해서, 막상 갔더니 오픈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어디 쉴 곳이나 알아볼까 하면서 또 걸었다. 정말 다리가 아팠다. 흑흑

사진은 길을 가다가 본 어느 인상깊은 간판. 이것이 바로 러시아식 개그인가! 하고 생각을 했다. 만약 시간이 점심이나 저녁이었다면 맥주를 마시러 이 가게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문을 열었다면). 하지만 아무리 맥주가 좋아도 아침 열 시에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포스트 맨 위의 지도에 보면 H&M이 표시되어 있는데, 별 건 아니고 한참 방황하면서 걷다가 찾아간 곳이 H&M이었다. 그냥 모자(캡)를 사러 들렀을 뿐이다. 앞머리가 뭔가 불편하게 길어서 머리를 고정해 둘 모자를 사러... 가기까지... 어쩔 수 없이 걸었다.




애초의 계획이었던 음악 박물관까지 또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 바로 근처에서 버스를 잡아 타고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정치사 박물관도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니 거길 가기로 했다. 저 형광색 부분이 있는 조끼를 입은 사람이 차장님이다. 보통은 나이많은 여성인 것 같던데 이번엔 젊은 여성이었다.




정치사 박물관이다. 넵스키 대로에서 버스로 서너 정거장만 가면 된다. 박물관 홈페이지




오디오 가이드가 신기해서 찍어 봤다. 저 전자 펜과 설명용 판 같은 게 같이 있는데, 설명용 판에 있는 전시실 번호를 펜 끝으로 가리키면 펜에 내장된 스피커에서 해당 전시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이 박물관에는 영어 설명이 없는 곳도 많은데, 그래도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전체적인 전시실 설명 정도는 들을 수 있다. 물론 오디오 가이드는 무료가 아니고, 그렇게 싸지는 않다.




정치사라고 해도 수세기 전 표토르 대제 같은 정치사는 아니고 비교적 현대 정치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다. 대략 19세기 즈음부터 다뤘던 듯. 소련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내가 제일 궁금했던 부분인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 당시를 상징했던 사진과 신문 기사가 콜라주되어 있다. 빅토르 최를 보러 간 장소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곳에도 그를 보았다. 고르바초프 바로 옆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 말기의 정치적 상징이고, 키노와 빅토르 최는 같은 시기의 문화적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맨 오른쪽에 고르바초프가 있고, 그 왼쪽에는 비틀즈의 사진과 바로 아래에 빅토르 최의 사진이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붕괴에 있어서 비틀즈, 그리고 비틀즈가 상징하는 영미권의 대중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물론 자본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입장에 선다면 답은 간단하다. 냉전 시기 공산주의권의 경직된 문화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준 것이 자본주의권의 비틀즈였고, 그것을 듣고 자란 이들이 자라나서 소련 사회에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를 달라고 열망했다. 그 열망의 상징이 키노 같은 밴드였다. 그래서 결국 공산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 라는 답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소련의 기존 대중음악 정책이 굉장히 경직되고 답답해 보이긴 한다. 모든 것을 국가의 이념(그 이념이 좋든 나쁘든)에 따라 허가하거나 불허하는 그런 정책이라면 솔직히 좀... 한편으로는, 당시 소련에서 젊은 세대가 원하던 것이 '변화'였긴 하지만 그 변화가 반드시 옐친과 푸틴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러시아였을까 싶기도 하다. 미국 70년대의 반전운동이 변화를 요구했지만 그것이 미국이 자본주의를 버리는 이유가 되진 않았듯, 빅토르 최의 세대가 꿈꾸던 사회 변화와 이후 소련/러시아가 걸은 길은 같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주제는 앞으로도 더 알고 싶다.




소련 시기의 문화운동/음악이었던 바르드에 대해 더 알고 싶은데 마침 관련 코너가 작게 있길래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사진의 인물 율리 킴(Ю́лий Черса́нович Ким)빅토르 최처럼 아버지가 한국계 러시아인이고 어머니가 러시아계 러시아인(?)인 인물이다. 이 시기의 주요 바르드 시인 중 한 명이며 남한을 최근에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가 너무 어릴 때 사망하고 아버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외가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실제로 지금의 남한과 문화적으로 무슨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빅토르 최처럼 소련과 러시아의 맥락 속에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한국계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김
위키피디아 [율리 킴]
그의 책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

등등. 


의외로 러시아에서 이 주제를 다루더라도 아주 새로운 관점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혁명 초기의 민중의 고통, 스탈린의 대숙청과 공포, 흐루시초프의 개혁,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변혁 열망, 그리고 소련 붕괴. 이런 테마들인데, 자료가 자세하긴 한데 전체적인 서사 자체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정도였다. 옐친 시기이나 푸틴 시기에 대해선 너무 최근이어서 그렇긴 하겠지만 설명이 거의 없고내가 러시아어 자료를 읽을 수 없었고 정보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이런 박물관은 사실 가이드가 있어서 같이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면 좋은데, 영어 박물관 투어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자주 없을 것이고 여행을 하다 보면 내 일정이 있기 때문에 영어 투어가 언제 있는지 알아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한번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으니 내 스스로 정보를 찾아봐야겠다.



다음으로는 박물관 바로 옆의 '밥집'에 갔다. '밥집'이란... Babjib이란 이름의 한식당이다.

그냥 한식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변명을 하자면 어차피 나는 제3국에서 여행을 온 것이므로 이 여행이 끝나면 돌아가서 바로 한식을 먹고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만에서 한식을 먹으나 러시아에서 한식을 먹으나 뭐 별 차이는 없다.



이 집은 솔직히 들어가서 약간 놀랐다. 일단 최근에 지어진 집인지 굉장히 깔끔하고, 그리고 티비에선 케이팝만 계속 틀어준다. 오른쪽 벽에는 한류 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에... 여기가 서울인지 타이페이인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인지. 러시아에도 케이팝 팬이 있긴 하겠지만 그걸 테마로 장사할 만큼 있을까?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2-3시)이라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내 근처 테이블에는 러시아인과 북유럽인이 영어로 대화하며 케이팝과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내용이 들릴 만큼 자리가 가깝지는 않았다.





메뉴판을 보면 굉장히 깔끔하고, 별별 메뉴가 다 있고, 그리고 값이 비싸다. 근데 이 정도 로컬한 한식을 먹으려면 물가가 상대적으로 싼 대만에서도 돈을 좀 줘야 한다. 그리고 여행을 너무 힘들게 할 수는 없으니 쾌적한 곳에서 쉬어가는 대신 어느 정도 돈을 지불한다고 보면 그렇게 비싸지는 않다.



불고기와 라면을 시켰는데 여기가 서울인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인지... 근데 정말 한국처럼 나온다. 일단 수저가 한국식 수저고, 김치도 그냥 한국에서 먹던 맛이고, 불고기와 라면도 너무나 한국스럽다. 심지어 컵도 익숙한 컵이다.

메뉴판에서 보듯 고가이긴 한데 양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한 끼를 훨씬 초과하는 양인데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지 많다 하면서도 잘 먹었다.


점원들은 러시아인인데 내가 들어오니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하신다. 그리고 한국어를 조금 배우시는 것인지, 계산할 때 계산대를 언뜻 보니 한글로 '러시아'라고 써본 흔적이 보여서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여행을 하다가 한국음식이 먹고 싶은 경우에는 가 볼 만한 곳인 것 같다. 흠. 대만에 돌아온 지금도 한식은 먹고 싶다.


이 다음에는 빅토르 최가 묻힌 묘지를 찾아갔다. 다음 포스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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