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4


아르바트 거리에서 역시 가봐야 할 곳은 빅토르 최의 벽(Стена Цоя)!

빅토르 최의 벽이란 말 그대로 벽으로, 빅토르 최의 사망 후 팬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그를 기념하는 각종 그래피티를 해 놓은 장소이다. 벽이 있는 건물에 그와 관련된 게 있다거나 이런 게 아니라 정말 그냥 빈 건물의 빈 벽이었는데 그래피티가 모여서 이렇게 된 것이다. 그의 탄생일이라거나 사망일이라거나 아님 뭐 평소에도 팬들이 와서 헌화를 하거나 그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곳이다.

이 벽은 '빅토르 벽' 중에서 말하자면 원조이고 제일 유명한 벽인데 다른 도시 몇 곳에도 빅토르 최의 벽이 있다. 예를 들면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Стена Цоя라고 검색해 봐도 하나 나온다. 키노는 소련 해체 전에 활동하던 밴드였고, 빅토르 최는 단지 러시아만의 영웅은 아닌 것이다.

아르바트 거리 전체의 관광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어지러운 그래피티가 즐비한 이 벽은 좀 이색적(?)이다. 그래서 듣기로는 정부에서 철거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하고, 그런데 이미 이 곳이 전국적으로 하도 유명한 곳이라 빅토르 최의 흔적을 없애려는 행위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아직 잘 남아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나는 근래에 학교에서 알고 지낸 러시아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최근에 여기 일어난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고, 그래서 무슨 일이었을지 궁금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소나기가 오다가 그친 상황이었다.




벽에 빼곡히 들어찬 그의 사진과 그를 기념하는 흔적. 가사를 써놓은 사람들도 있었고. 근데 여기서 제일 희한했던 것은 마지막 사진 중앙에 있는 '장승'이었다. 누군가 붙여 놓은 것인데, 빅토르 최가 한국계라는 것을 의식해 한국을 상징하는 기념물인 장승을 붙여 둔 것일까? 정말 신기했다. 한국 사람이 한 건 왠지 아닐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장승은 일상적인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빅토르 최가 한국계라는 걸 의식한 어떤 러시아 팬이 본인이 한국 하면 떠오른 장승을 붙여 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자세힌 모르겠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한국 장승 박물관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한번 '러시아 장승'이라고 구글 검색을 해 보니 이런 뉴스만 나온다. 극우주의자들이 러시아에 설치된 한국 장승 구조물을 훼손해 러시아 정부 측에서는 사과의 뜻을 표명하고 결국 장승은 철거되었다는 뉴스이다. 정말 너무하네. -_-;;

러시아 간 한국 장승의 수난..결국 철거




원래 이 홈은 꽃을 헌화하거나 향 대신 담배를 놓는(빅토르 최가 골초여서) 장소인데, 방금 비가 와서 별로 보기 좋은 상태는 아니다. 바닥에 있는 흰 것들은 그래피티할 때 썼을 페인트의 흔적이다.




뭔가 어떤 사람이 슬슬 기타를 꺼내서 노래할 준비를 한다...

내가 러시아에 오기 전에 앞에서 말했던 그 러시아 학생에게 들은 것은, 얼마 전에 이 벽에 일어난 '테러 사건'이었다. 누군가가 여기다 안 좋은 걸 써 놨고, 그게 뉴스 헤드라인으로 나와서 전 모스크바 시민들이 들끓었다, 벽에 쓰인 문구는 지워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그 학생이 했다. 대만에 거주 중인 그 학생이 알게 될 정도면 뉴스가 크게 나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안 좋은 이야기가 뭔지 궁금했고 자세히 이야기를 듣지 못한 나로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테러했나? 라는 생각까지 했다. 위의 저 장승 테러 이야기처럼.

나중에 알고 보니 벽에 누가 '초이는 죽었다' 라는 말을 써 둔 것이었다고 한다. 빅토르 최의 팬들에게는 '초이는 살아 있다! (Цой жив!)' 라는 구호가 클리셰처럼 쓰이고 있다. 갑작스럽게 가 버린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 말일 것이고, 또 그가 죽은 지 오래 지났어도 사람들에게 기념되고 추억되고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초이는 살아 있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튼 이걸 뒤집어서 '초이는 죽었다'라고 써 둔 것인가보다. 일단 인종차별주의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으니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다. 

인종차별주의 생각이 났던 건 유튜브의 어느 덧글 때문이었다. 러시아 극우주의자들 중 일부에게는 빅토르 최 역시 이민족으로서 타도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덧글을 예전에 우연히 보았기 때문이다. 스킨헤드들이 공원에서 빅토르 최의 사진을 태우는 걸 봤다는 말이 그 덧글에 쓰여 있었다. 솔직히 좀 충격적이고 슬펐다. 러시아 어딜 가도 그는 영웅이고 아이콘이었는데 그 사람마저도 극우주의자들에겐 박해의 대상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초이는 죽었다'는 겉으로 보기엔 그런 극우주의와는 관계가 없어 보여서 좀 다행이었다.

아무튼 저 벽을 보면 벽 중앙의 어느 부분에만 뜬금없이 회색으로 새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문제의 그 '초이는 죽었다' 부분에서 '죽었다' 부분을 덮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잘 덮었군! 아무튼 그 러시아 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으면 저걸 보고도 아무것도 몰랐을 텐데, 알게 되어서 좋았다.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을 찍은 것이다. 그런데 저기서 다들 합창을 하고 있는데 다들 아는 사이인지 아닌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내 핸드폰 카메라를 향해 브이자를 해 보이는 저 행색이 남루한 맨발의 남자는 황당하게도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촬영을 종료한 내게 와서 뭐라 하길래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니 영어로 Lend me one dollar please! 라고 -_-

사실 그래피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너무 인색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피티가 도시를 음침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에서도 그래피티를 많이 보았고 보통은 안 그래도 치안이 나쁜 러시아의 도시를 황폐화하는 효과가 나던데... 이 벽도 좀더 거리의 분위기에 맞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님 이 벽 자체만 덩그러니 두지 말고 그의 기념관이라도 붙여서 하나 만들거나. 물론 그의 팬으로서 이런 장소가 있어서 기쁘고 없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기념품점 입구를 찍은 것이다. 아르바트 거리엔 이런 기념품점이 많은데 사실 품질은 안 좋은 경우도 많아 보였다. 그래도 결국 이런 가게에서도 소소한 걸 몇 개 샀다.




그리고 그 '쉑쉑버거'에 갔다. 다리가 아팠고 충전을 하고 싶었고 맥주가 마시고 싶었는데 혼자서 갈 만한 가게가 마땅찮았다. 그래서 결국 쉑쉑버거에 나도 모르게 오게 되었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는데 맥주만 마시긴 좀 뻘쭘했으므로 간단한 핫도그 같은 걸 같이 시켰다. 맥주는 러시아답게 맛있었고(여긴 생맥주가 어딜 가든 다 맛있는 것 같다) 핫도그도 맛있었던 것 같다. 가격은 좀 비싼 편이었다.


아르바트 거리 구경을 마치고 붉은 광장으로 다시 가 본다.



크고 아름다운 소비에트 지하철 역을 지나




크고 아름다운 붉은 광장! 에 왔다. 여행 내내 친구들과 별다른 연락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이 때만큼은 아는 사람들에게 막 카톡을 보내 지금 내가 붉은 광장이라고 자랑질을 했다. 붉은 광장은 정말 붉었고, 성 바실리 성당은 듣던 대로 비현실적으로 예뻤고, 레닌의 묘를 보니 마음이 왠지 무거워졌다. 어릴 때 성 바실리 성당의 작은 모형이 집에 있었는데 그걸 이렇게 보게 되다니 신기했다. 그런데 워낙 비현실적으로 생긴 건물이라 실제 크기의 건물을 봐도 모형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근처의 굼 백화점에 들어왔다. 굼(GUM/ГУМ) 백화점은 소련 시절의 몇 안되는 백화점이자 가장 중요한 국영백화점이었는데 소련 해체 후에는 그냥 고급상품이 가득한 백화점이자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들어가 보면 일반 시민들과는 관련없어 보이는 고급 브랜드가 즐비하고, 또 한편으로 1층에서는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팔고 있고, 곳곳에 카페 및 식당이 있고 그렇다. 같은 날 방문했던 유로피안몰이 진짜로 러시아 시민들이 이용하는 백화점 및 마트라면 이곳은 전시용 백화점(?)이자 관광지로 운영되는 느낌. 건물 자체도 단순한 일반 백화점과 다르게 굉장히 아름답다. 그건 그렇고 이 곳에서 한 가지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 화장실이 지저분했다는 점이다.




굼을 나와서 집에 간다.




다시 한 번 소비에트식 지하철역을 감상한 뒤 숙소에 도착했다.



이 날은 숙소에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어서 잠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혼자 여행하고 있고 또 현지언어를 못하다 보니 사실 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그래도 중간중간에 이런 기회가 생겨서 재미있었다. 침대에 앉아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계시던 그 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인데 모스크바에는 놀러온 것이라고 하셨다. 

그 분에게 조금이나마 러시아 현지 이야기를 들어서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러시아 대학생들도 한국 대학생들처럼 술을 자주 마시냐고 물어보니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선 음주가 굉장한 사회 문제가 되고, 술을 마신다고 하면 평균수명 단축, 범죄, 치안불안 이런 것과 연결이 자주 되어서 술 마시는 것을 굉장히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대학생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음주와 거리를 두는 편이고, 술을 마시더라도 한국 사람들처럼 나 술 잘 마셔! 하면서 자랑하고 이런 건 없다고 하셨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특히 여성의 음주는 안 좋게 또는 위험하게 본다고 한다. 그리고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러시아에는 흡연인구가 정말 많고 간접흡연도 하루종일 할 수 있는데, 현지인들 또는 현지 학생들의 경우 흡연에 대한 시선도 안 좋다고 해서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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