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30


여행 3일차! 어제의 불안을 딛고 그래도 나가 본다. 아무튼 왔는데 방에만 박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숙소는 상당히 좋은 곳인데, 숙소를 나가면 건물 자체(그러니까 각 방이 아닌 공간)은 굉장히 음침하고 낡아 있다. 빅토르 최가 출연한 80년대 말의 러시아 영화를 보면(Assa, Igla) 이런 분위기의 굉장히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나오는데, 어째 30년이 지난 지금의 이 숙소 건물이 그 영화 속의 건물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돈이 없어서 보수공사를 안 하는 걸까?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건물에는 굉장히 인상깊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저 두 번째 사진이 엘리베이터이다. 문을 열면 딱 한 사람과 그의 여행 캐리어가 들어갈 공간만 있고, 문이 삐걱거리면서 닫히면 삐걱거리면서 엘리베이터가 이동한다. 내부의 조명은 있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어두워서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100년 전쯤에 만들어진 후 개조되지 않은 엘리베이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지금의 숙소에서는 오늘 체크아웃을 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체크아웃을 하고 나온다.

두 번째 숙소를 찾아갔다. Friends on Vosstaniya라는 곳인데 이 곳은 시리즈로, Friends on ~ 이라는 호스텔이 러시아 전역에 많고, Vosstaniya는 이 곳의 도로명(또는 지명)이다. 아무튼 거기에 짐을 맡기고 나서 다시 나왔다. 입구를 찾기 힘들어 호스텔에 전화를 걸었는데, 덕분에 찾았다. 첫날 통신사에서 유심을 구매할 때 '데이터만 있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는데, 심카드 내에 전화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오른쪽 위가 두번째 숙소, 오른쪽 아래가 갤러리아 백화점, 지도 중앙이 러시아 박물관




갤러리아백화점은 두번째 숙소 근처에 있는 "그냥 백화점"이다. 여기 1층에 스타벅스가 있길래 또 스타벅스에 왔다. 와서 아이스 커피 '콜드 브류'를 또 시키고는, 먹으면서 핸드폰 충전을 하고 에어컨을 쐰다. 야레야레... 이런 것이 자본의 안락함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만 수용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쉬어 가는 타이밍도 꽤 많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느낀 것은, 이상한 말이지만 스타벅스 점원들은 다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 젊은 사람도 영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타벅스에서는 소통에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알바도 이런 걸 보고 뽑는 것인지, 정직원을 뽑는 건지, 아니면 이들이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단 그 상황에 맞는 영어(주문에 필요한 단어 같은)를 잘 구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여행 동안 간 모든 스타벅스의 직원들은 러시아 평균보다 친절했다.




밥을 먹으러 갤러리아 백화점 4층에 있는 Marketplace라는 가게에 왔다.

Marketplace는 넵스키 대로에도 있는 가게인데, 고급 뷔페이다. 요리사들이 요리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음식을 이걸 달라고 가리키면 그 음식을 담아주고, 나중에 나갈 때 총 액수를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사진에 있는 카드는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기록을 위해 찍는 카드였는데, 넵스키 대로에 있는 지점에는 이런 카드 계산 방식이 없었다. 아무튼 직접 가서 보면 주문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대만식으로 말하면 쯔주찬(自助餐)인데 고급 쯔주찬 가게인 것이다.

루블 가치가 낮은 덕분에 굉장히 배부르게 잘 먹고도(위에서 사진찍은 것 말고도 더 있었음) 500루블(만원 미만)이 나왔다. 그런데 여행하면서 계속 느꼈지만, 과연 이런 가격이 현지인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 왜냐하면 지금이야 1루블이 18원이지만 몇 년 전에는 1루블이 35원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500루블이라면 2만원이 다 되어 가는 가격인데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 아닌가?

러시아에서 5년 전 쯤 친척분이 사셨던 적이 있는데, 러시아에 대해 하신 이야기 중 하나가 "외식을 하면 너무너무 비싸서 현지인들은 다들 샌드위치 같은 걸 집에서 싸와서 먹는다. 그리고 물가 자체가 정말 비싼데 어떻게 다들 살아가는지 궁금하다"였다. 1루블이 35원이었던 때의 환율로 계산을 해 보면 이게 엄청난 가격이라는 걸 알게 된다. 다행히 러시아의 식료품(요리를 거치지 않은)은 싸서, 직접 요리를 해먹으면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이 갤러리아 백화점은 그냥 백화점일 뿐이었지만 하나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바로 위의, 밀리터리 용품점이었다. 군복이나 모조 총 등을 파는 곳인데, 한국 백화점에서 이런 가게는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밀덕의 마음을 끓게 하는 러시아답게 과연 현지인 밀덕들도 많은 것인가? (???)




이번 여행에서 굉장히 많은 경찰과 군인들을 봤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경찰과 군인 병력을 풀어 도시의 치안을 감시하고 있는 듯 했다(물론 사진의 군인 혹은 경찰들은 그냥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을 뿐이지만). 대형 테러사건이 일어나기도 한 러시아인 만큼, 그리고 지금 전세계적으로 테러가 빈발하고 있는 만큼, 이렇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찰이 부패하다 못해 치안을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여행자 입장에서는 경찰이 있으면 치안이 좀더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러시아 국내 정치에서 집권당 반대 시위나 퀴어 퍼레이드를 방해하고 때려잡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넵스키 대로에서 오늘도 헤맨다. 

왼쪽의 포스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베테랑급 록밴드들이 합동으로 여는 콘서트인 것 같다. 맨 위에는 스플린(сплин)이고, 두번째로는 앞서 말한 아쿠아리움(Аква́риум), 세 번째는 유-피터(Ю-Питер)이다. 유-피터는 비교적 최근(2000년대 초반)에 활동을 시작한 밴드이지만 새로운 밴드가 아니라 말하자면 슈퍼그룹이라 할 수 있다.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Наутилус Помпилиус)의 보컬과 키노(빅토르 최의 그 그룹)의 기타리스트 등이 모여서 만든 밴드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들 베테랑급인데 이렇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듯 하다. 8월 콘서트라고 하니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유-피터의 페이스북 페이지: 링크




거리의 음악가들. 현악 4중주단이다.

그리고 이 날부터 넵스키 대로를 걸어다니느라 슬슬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는데, 여행 끝까지 계속 다리가 아팠다. 이 여행기에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다리아프다는 말이 종종 등장하게 될 것이다.

넵스키 대로는 사실 다니기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것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는 걷기에는 상당히 먼데, 그렇다고 지하철을 타도 시간 절약이 안 된다. 이 곳의 지하철은 깊어서, 한국과 달리 승강장까지 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를 타면 교통체증이나 인파에 찡기는 수가 있다. 그래서 계속 걸어다녔더니 다리가 꽤 아팠다.




어제 오려다 실패했던 러시아 박물관에 왔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관 하면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떠올린다. 왜 그 곳에 가지 않고 러시아 박물관에 왔냐 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카드로 사용가능한 내역에는 러시아 박물관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런 실용적인 이유에서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일단 '이 3일간의 관람 내역'에선 제외한 셈이다. 3일치 카드를 샀으니까. 하지만 러시아 박물관 자체도 굉장히 좋은 곳이라고 들었기에 와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찍은 사진은 그다지 예쁘게 나오지 않았고, 실제로 가면 훨씬 아름답다. 아마 인터넷에도 훨씬 더 잘 찍힌 사진이 많을 것이다.

이곳은 '러시아 박물관'이라는 이름답게 러시아의 미술이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곳이었다.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중세의 이콘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러시아 미술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초점을 맞추어서) 정리되어 있는데, 이곳도 굉장히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미술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면 여길 와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박물관이 원래는 궁전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건물 자체가 굉장히 아름답다. 물론 러시아 대부분의 다른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사진 촬영도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가능하다.

오디오가이드를 400루블을 내면 받을 수 있다(싸진 않다). 중국어가 있었는데, 영어 가이드를 달라고 하자 박물관 직원분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신다.

이 미술관의 테마는 '미술로 보는 러시아 역사' 정도인 것 같다. 

미술관 내부는 정말 크고 작품도 굉장히 많은데, 다리가 아프고 정신집중에 한계가 있어서 후반부에는 막 그냥 지나쳐 버린 작품도 많다. 아쉽지만 이런 것도 인연일 것이다. 오디오가이드는 비싼 만큼 굉장히 설명의 양이 많고 충실하다.




이 그림은 이 미술관에서 내가 제일 인상깊게 본 작품이었다.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작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그려내기 위해 애썼다고 했다. 이 그림을 보면 전쟁이 끝난 후 양편의 병사들이 모두 죽어 나동그라져 있다. 이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밝은 옷을 입은 병사들과 푸른 옷을 입은 병사들이 있는데, 죽어 쓰러진 것은 어느 편이든 마찬가지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그 중 이긴 편(밝은 옷 편이다)이 모자를 던지며 환호하고 있다. 백마에 탄 사람은 사령관쯤 될 텐데 몸을 잔뜩 뒤로 젖히고 거만하게 승전보를 울리고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죽은 이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체가 되었을 뿐이다. 정말 부질없는 죽음이다. 군인이자 화가였던 작가는 전쟁에 참여하며 이런 전쟁의 참상을 꾸준히 그림으로 그려냈다고 하는데, 본인도 러일전쟁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그냥 그림일 뿐인데 굉장히 사람을 울리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구글 이미지검색을 통해 이 그림의 작가를 알아냈는데 바로 바실리 베레시차킨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블로그 글을 참고.




러시아 민속 의상이나 예술도 소량 전시되어 있다.



칸딘스키 풍이네? 라고 생각헀는데 칸딘스키의 작품이었다.




전시 후반부에는 소비에트 미술도 조금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양이 많지는 않은데, 이 곳이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맘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박물관 설명에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한번 둘러보고 나왔다. 다른 박물관을 하나 더 가보려고 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안 될 것 같았다.



길가에서 본 러시아의 서브웨이. 러시아에서 서브웨이가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지점이 굉장히 많았다. 이번에 가보진 않았다.




길거리의 가게에서 치킨 파이(맛있었다)와 맥주를 마시며 잠시 휴대폰 충전 및 휴식.



이 다음에는 "캄차카"를 가게 된다. 러시아의 지명 캄차카가 아니라 빅토르 최의 기념관 및 기념 클럽 역할을 하는 곳이고,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늦었으니 포스팅은 이만 하고 내일 이어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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