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1
계속 혼자 하는 여행이어서 입이 좀 심심했지만 이 날만큼은 말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일일투어를 신청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기반 일일투어 사이트가 한국에도 하나 있는데 그 사이트에서 신청했다. 투어 종류가 여러가지 있는데 걸어서 도시의 주요 관광지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둘러보는 일정을 신청했다.
관광지에 가면 투어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같은 것이라도 혼자 볼 때와 설명을 들을 때는 이해 정도가 확실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 같은 것도 좋고, 이렇게 직접 투어하는 것도 좋고. 근데 패키지 여행이라고 부르는 단체 투어관광은 또 좋아하진 않는다. 혼자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 같이 투어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우면 빨리 헤어지고 싶을지도 모르고, 그런 것이다. 게다가 단체 관광에서 가는 식당(왠지 단체관광객들만 가는 것 같은 그런 식당)이라거나 단체 관광에서 데리고 가는 특산품 판매 장소(누군가가 몇개 사줘야 이 뻘쭘한 시간이 끝날 것 같은 그런 상황) 그런 게 좀 그렇다. 그래서 일일 투어나 박물관 설명은 좋은데 패키지 여행은 좀...
아무튼... 투어를 신청했고, 오전에 집합했다. 걷기 시작했다.
이 곳은 러시아 제정 시기 표토르 대제가 유럽에서 문물을 배우고 온 후 지은 최초의 조선소라고 한다. 찍은 사진 자체는 선명한데 이상하게 업로드를 하니까 사진이 흐려진다.
표토르 대제가 손수 배를 만들어 보이는 모습을 나타낸 동상이다. 위의 조선소와 같은 맥락에서 황제가 손수 나서서 유럽의 과학기술을 시범 보이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이 동상은 소련 시기에 철거되었는데, 그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네덜란드 정부에서 이 동상을 다시 만들어서 러시아 쪽에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표토르 대제가 당시 기술을 배우러 갔던 곳이 네덜란드 쪽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을 흐르는 네바 강이다. 강변을 걷는다.
사진 속의 가이드 안나 씨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인데 직장인이고 아마 부업(?)으로 이 일을 하시는 것 같다. 이 날 안나 씨가 가이드를 해 줘서 되게 좋았는데, 여러 모로 인상적인 분이었다. 이야기해 주신 많은 게 기억에 남지만 우선 이 분의 한국어 실력 자체가 인상깊었다. 유창한 한국어로 고급 어휘를 사용하여 러시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에 대해 소개해 주시는데, 물론 가이드 때문에 공부도 하셨겠지만,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계속 외국어를 쓰고 있는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에 관심이 가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한국어를 이렇게 잘하시냐 물어봤더니 대답이 더 놀라웠는데, 원래 언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한국어'도' 배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어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서 어렵지만 한국어도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하신다고. 한국에 가보신 적도 없다고 한다. 아니 그럼 한국어만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는 건데... 세상은 넓고 대단한 사람은 많은 것이다. 나이도 굉장히 어리셨는데... 대만에 살면서 중국어도 어설픈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표토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다.
이 다리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뭔가 소련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어서 가이드분에게 여쭤봤더니, 다리 자체는 제정 시기에도 있었는데 이 장식이 소련 시기에 추가되었다고 하신다.
그냥 말이 나온 김에 지금의 러시아 사람들은 소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자신한테는 좋지도 싫지도 않고 그냥 과거에 지나갔던 한 시기라고 생각한다는 답을 들려주셨다.
네바 강을 건너면서 본 왼쪽의 '스탈린식 건물'...
이런 게 전형적인 스탈린식 건물이라고 가이드분이 설명을 해 주셨는데 러시아 자체도 낯설고 건축 양식에도 문외한인 내 입장에선 뭘 보면 스탈린식 건물인지 알 수 있는지도 궁금하고, 스탈린식 건물도 제정 시대보다야 나중에 세워진 거지만 내겐 굉장히 고풍스러워 보인다.
저 '배'를 찍으려 하다가 사진이 가렸다. 저 배처럼 생긴 것은 수상 레스토랑인데 굉장히 비싸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격투기 선수 효도르가 주인이라고 한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 왔다. 이 때가 마침 정오였다. 정오에는 제정 시기의 전통을 이어 대포 한 방이 울리는데, 당시에 정오에 대포를 울린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왜 술마시자는 표현을 목 쪽을 톡톡 두드려가면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들었는데, 진짜인지 전설인지 몰라도 인상깊었다. -_-;;;
왠지 몰라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는 이 토끼 상이 유명하다. 여기가 포토스팟인 것 같다.
토끼는 러시아에서 다산의 상징이라고 하며(새끼를 한번에 많이 낳으니까) 이 동상을 만지면 다산을 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 가이드분이 다산을 하고 싶은 분은 토끼를 만져보라고 하셨다. 물론 난 만지지 않았다.
이 역광이 뚜렷한 사진은 표토르 대제의 상과 그 손을 만져보는 나인데... 앞과 마찬가지로 동상에 관한 속설이 있어서, 동상의 손을 만지면 표토르 대제처럼 유능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손 부분만 반짝거린다. 이번에는 흔쾌히 만져보았다.
그나저나 저 동상은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데 일단 표토르 대제의 머리가 어색할 정도로 작고, 손은 엄청 길고, 그리고 표토르 대제가 대머리다. 왜 이렇지?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하다.
이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제정시기 건물을 지은 건축가들을 한데 모아둔 동상이다. 포토스팟이기도 하다. 이들이 모두 러시아 사람인 것은 아니고 서유럽에서 건너온 건축가들도 있는데, 아무튼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이렇게 공로를 기념하고 있다.
어제부터 다리가 아팠던 나는 이 시점에서 몹시 체력이 고갈되었는데... 아무튼 다행히 밥을 먹으러 왔다. 쳬례목(Teremok)에 와서 블린을 먹는다. 저 접시에 담겨있는 밀가루 말이가 블린으로, 안에는 매우 다양한 재료를 넣을 수 있다. 식사용의 짠 블린도 있고, 디저트용의 단 블린(안에 과일이나 초콜렛 같은 게 들어감)도 있다. 한 사람이 하나씩 시켰다.
그리고 음료 중 맨 앞에 있는 누런빛을 띈 것은 미드(Mead)이다. 벌꿀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라고 알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 술을 자주 마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쳬례목에 생맥주 가격 정도 하는 미드가 있었다. 가이드분이 꿀맥주라며 소개를 해 주시긴 했는데 영어 메뉴판에 mead라고 써 있었으니 미드일 것이다. (꿀맥주라는 표현을 쓰시다니, 한국어를 굉장히 로컬하게 하신다고 생각했다!)
블린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피자 비슷한데 도우가 아주 얇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번에 여행하면서 러시아 사람들은 음식을 전반적으로 짜게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쳬례목 블린도 뭔가 약간 짜다.
성 이삭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동상(아마도 표토르 대제의?)이다. 보수공사인지 청소인지 하고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이다. 중간의 빨간 스티커는 물론 얼굴을 가리는 용도이다. -_-;;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지붕 맨 위의 부분은 보수공사를 해서 뭘로 가린 건지 싶다.
내부에도 들어가 보았는데, 내 얼굴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방해하고 있는 사진밖에 없어서 사진을 올릴 수가 없다. 아무튼 굉장히 화려하다.
그 다음으로 좀 한참 걸어서 또는 지하철을 타서(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구세주보혈성당에 도착했다. 중간에 내가 커피를 산다고 일행을 잠시 놓쳐서 일행이 나를 찾는 사고가 발생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다니면서 정말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하나같이 색감이 너무 특이하고 아름답다. 구세주보혈성당은 막 밝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다소 육중한 색감을 하고 있긴 한데, 저 황금빛과 하늘색, 초록색의 돔이 굉장히 눈에 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대의 일반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보아서 저 색들이 그냥 무난하게 어울리는 색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안 어울릴 것 같은 색을 한데 둘 생각을 했을까?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미감은 정말 희한할 정도로 개성이 강한 것 같다. 그것도 모든 성당이 다 비슷비슷한 것도 아니고 개별적으로 색감이 다 다르다.
내부는 앞서 들른 성 이삭 성당과 마찬가지로 정말 아름답고 화려하다.
이렇게 황실이 엄청난 돈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압도적인 건축물을 지었다는 그런 종류의 서사에 나는 사실 좀 거부감이 있다. 현대인 중에서도 이런 서사를 들으며 그런 자금력과 권력이 있는 황실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분제가 없어지고 인간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지금에 와서는 그런 권력의 역사를 너무 좋아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황실의 업적은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세금, 피 위에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러시아 제정의 역사가 흥미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정도로 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뼈빠지게 일해야 했을까" 싶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아름다운 궁전과 건물을 세운 덕분에 이렇게 지금도 여행객이 와서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은 좋긴 하다.
그나저나 내가 성당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내가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만약 내가 신자였다면 정말 이런 찬란한 기독교 미술의 성지에서 큰 감동을 느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날 본 성당 모두가 대단했다.
이 부분을 보면 뭔가 장식이나 그림이 뜯겨져 나가서 흔적만 남아 있다(갈색 부분). 이 부분은 소련 시절에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돈이 궁해진 정부가, 안 그래도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던 기독교 미술을 외국에 내다 팔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 때 흩어진 조각이 어디 갔는지 러시아 정부에서 열심히 찾고 있다고 한다.
이 날 투어에서는 황제들의 흔적과 성당을 다니다 보니,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제정 시기에 이게 있었는데 소련 정부에서 없애서..." 이런 이야기. 일단 소련 정부는 당연히 계급적인 관점에서 러시아 황실의 역사와 적대적이었으며, 황실의 흔적을 없애려고 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의 성격상 종교와도 당연히 뜻이 달랐기 때문에 정교회의 흔적도 지우려고 많이 노력을 한 것 같다. 또한 가이드분의 말에 따르면 소련 정부가 정교회를 싫어한 이유는 정교회가 역사적으로 러시아 제정과 함께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한다.
아 그리고, 구세주보혈성당 근처에서 어떤 길거리 음악가가 빅토르 최의 노래(아마 '뻐꾸기' 였던 듯)를 부르고 있길래 마침 생각이 나서 안나 씨에게 빅토르 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안나 씨도 왠지 키노를 좋아하거나 어느 정도 잘 아는 것 같고, 그리고 기타도 칠 줄 아시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몇 가지 물어봤는데 가이드분이 하신 이야기를 너무 시시콜콜하게 인터넷에 올리는 건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기억에 남아서 써 본다. 먼저 클럽 캄차카(어제 갔던)에 대해 아시냐고 여쭤봤다. 근데 어느 정도 알려진 곳인지, 클럽의 이름은 모르셨지만 빅토르 최를 기념하는 곳이라고 하니 대충 감을 잡으신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하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혼자 가지 않는 게 좋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순간 식은땀을 흘리며 왜요? 라고 여쭤 보니, 빅토르 최의 팬들은 보통 남자들이기도 하고, 그런 라이브하우스에 가면 술마신 러시아 남자들이 있을 것이고, 좀 상황이 어색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나 씨의 말을 기억나는 대로 옮겨 보면, 러시아 남자들이 실제로 뭔가 나쁜 일을 하지는 않지만, 머리에 든 게 없는(!) 사람들이 있고 특히 술을 마시면 더 그렇다는 것이다. 머리에 든 게 없으니 막 아무렇게나 행동을 하고, 특히 혼자 온 외국인을 보면 막 뭐라고 자꾸 친한 척하거나 불편하게 행동하고 그래서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셨다.
...... 나는 사실 바로 그 전 날 한번 가 봤지만, 뭔가 이 시점에서 이미 가 봤다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색해서 듣고 있었다. 아무튼 안나 씨의 요점은 너무 늦게까지 혼자 남아 있으면 현지 남자들이 자꾸 이야기를 걸고 그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내 경우 최대한 조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번 여행에서 캄차카를 이 날 이후에도 한 번 더 가 봤는데, 안나 씨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적당한 시간에 나와서 집에 갔다. 다행히 내 느낌으로는 캄차카의 관객들은 팬심으로 노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이어서, 외국인이라고 자꾸 쳐다보거나 갑자기 말을 걸거나 술에 취해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근데 안나 씨가 일부 러시아 남성에 대해 한 위의 말은 뭔가 이해가 쏙쏙 된 것이었다. 여기 온 첫 날에 그 이상한 일(술취한 남자들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던, 혹은 부른다고 내가 착각했던 그 일)이 있고 나니까, '술에 취해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머리가 빈 남자들'에 대해 들으니 바로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지 감이 왔다.
아마 이틀 전쯤 지나갔던 것 같은 푸쉬킨 동상을 또 지나간다. 푸쉬킨의 팔 위에 있는 새들은 물론 조각이 아니라 그냥 도시의 비둘기들이다. -_-;;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비둘기가 한국보다도 훨씬 많았다.
지금 사진을 보니 이 날 날씨가 굉장히 흐렸던 것 같다.
러시아 여행 전에는 러시아에서 푸쉬킨이 이렇게 국민 시인인 줄 몰랐다. 푸쉬킨 동상도 여기저기에 있고 심지어 도시 이름도 푸쉬킨이 된 곳도 있고. 근데 사실 나를 포함해 일반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진 푸쉬킨의 면모란 그 "인생이 당신을 속일지라도"라는 너무 들어서 지루해질 정도의 시 한 구절뿐이기 때문에, 그의 인기가 어디서 오는지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 된 데에는 분명 문학적으로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그의 다른 작품도 더 접해 보고 싶다.
아 그리고 여길 지날 때쯤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일행 중 어떤 분이 스킨헤드에 대해 안나 씨에게 물어보신 것이다.
일단 안나 씨의 이야기로는 스킨헤드는 과거에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스킨헤드가 처음 등장한 이유는 러시아 내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무슬림 남성들은 보수적이어서 러시아 여성들이 심한 노출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 여성들을 쉽게 보고 성폭력을 행하거나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 충돌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스킨헤드 같은 사람들도 등장했다는 설명이었다. 말로만 듣던 스킨헤드에 대해 러시아 현지인의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되게 신선했다. 근데 이 설명대로라면 중국인이나 한국인 거주민들은 왜 맞고 살해당했을까? -_-;;; 많은 생각이 드는 설명이었지만 여기에 대해서 뭘 다투거나 토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가이드분이 외국인들에게 러시아의 안 좋은 측면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나도 대만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고 한국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같은 이야기라도 내부인들, 즉 같은 한국인들과 할 때랑, 외국인들에게 할 때는, 나의 위치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대답도 달라질 때가 있다. 한국에 있으면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어떤 점에서 안 좋다고 비판을 하게 될 때도 많다. 근데 외국에 나간다고 그 생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에게 이런 점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나의 위치성 때문에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변호를 하거나, 직접적인 비판 대신 '앞으로 나아질 것이다' 식으로 설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안나 씨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들으니 많은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렇고 러시아 여성들은 신체 노출을 별로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는 듯 하다. 배가 나온 젊은 여성들도 배꼽티를 자연스럽게 입고, 몸집이 큰 아주머니들도 비키니를 입고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고, 그런 장면을 자주 보았다.
가이드분의 정치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1917년 혁명 이야기를 하시다가 '지금의 러시아 대통령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데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 같은 것을 해도 항상 굶주리고 힘든 사람들이 계속 있기 때문에 혁명 같은 것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셨던 것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너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올리는 걸까? 아무튼 나는 이 날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 되게 좋았다. 이 여행 전체에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날 뿐이었고, 러시아인이 보는 러시아(물론 다양한 관점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를 표면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카잔 성당을 마지막으로 벌써 헤어질 때가 되었다. 시간은 오후 6시쯤. 가이드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구세주보혈성당 같은 기이한 색감의 건물과 비교하면 카잔 성당은 뭔가 굉장히 온건하고 성당다운(?) 느낌을 준다.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는 앞의 성 이삭 성당이나 구세주보혈성당과 달리 카잔 성당의 경우 지금도 예배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고, 안에 신자들이 줄을 서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우리같은 관광객은 그냥 들어가긴 했지만 신자들의 경우 남성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야 하고, 여성은 반대로 머릿수건을 쓰고 들어가야 하는 규칙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들어가는 여성 신도들은 다들 머리에 뭔가 쓰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릿수건 하면 이슬람의 히잡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사실 이슬람교뿐 아니라 동방정교회 또는 기독교에도 머릿수건의 관습(?)이 원래는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인가 싶다. 아 그리고, 성당에서뿐 아니라 그냥 길거리에도 머릿수건을 쓰고 다니는 여성들이 나이 많은 여성들의 경우 조금 있었다.
이렇게 일일투어를 신청해서 굉장히 좋았고, 안 신청했으면 섭섭했을 뻔 했다. 안나 씨랑 친해지고 싶지만 투어 가이드와 여행객으로 이국 땅에서 만난 이런 인연이다 보니 일단은 기약없이 작별을...
모스크바에서도 원래 도시 무료 투어(Moscow free tour)를 가려고 했는데, 나중에 어쩌다 보니 결국 못 가서, 혼자서 한 여행 중 이 날만 사람들과 함께 다닌 날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날은 계속 혼자 다녔기 때문에 내 사진이 있는 것도 이 날 하루뿐이다.
그 다음은 서점 돔 끄니기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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