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2.28사건 71주년을 맞아 오늘은 루보이(盧伯毅, 1925~1988) 선생의 이야기를 써 보겠다.


20대 초반, 대학 졸업 후 기상국(氣象局)에서 일하던 엘리트 청년 루보이는 1947년 2.28의 회오리 속에서 국민당군에 대항한 무장봉기 세력 27부대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27부대를 포함한 타이완 각지의 무장세력은 장개석의 남경정부 진압군이 파견되며 빠르게 패망한다. 무장세력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잠적, 망명 등의 길을 택했는데 루보이 역시 일본 망명을 택했다가 실종된다.



루보이가 망명 과정에서 사용한 가짜 대만 여권과 이름 (클릭하면 확대 가능)



대만에 남은 그의 처와 세 아이는 오랫동안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가, 1987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루보이가 서울에서 보낸 편지를 받게 된다. 일본과 대만을 오가던 도중 실종되었다고 여겨졌던 그는 사실 일본 내의 대만독립운동 조직에서 일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조직의 업무 수행을 위해 한반도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 도중 중공군에 의해 체포당했고, 중공군은 루보이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루보이는 거절하고 공산군의 중국에도, 국민당의 대만에도 돌아가지 않은 채 '중립국'인 한국에 남는다.


루보이는 서울에서 수십년을 살며 한국인과 다시 결혼해 자식들도 두었으나, 정식 여권도 신분도 없는 불법체류 신분이었기에 제대로 된 직업도 없었고 상당히 궁핍했다고 한다. 한국의 가족들은 그가 항상 고향 대만을 그리워한다는 것만 알 뿐 과거 행적은 물어도 답을 해주지 않았다고, 정치범인지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말년에 서울 자택에서 촬영한 루보이 선생



대만의 가족들은 40년이 지난 후에야 연락한 그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는 국민당의 탄압이 두려워 연락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87년에야 대만 가족들과 상봉한 그는 이미 모국어를 잊어버려 영어, 일어를 섞어 대화했다. 이미 대만에서는 해외 자유여행이 가능해 대만 가족들은 그가 이 곳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서울 관광을 왔을 정도로, 지난 수십년간 대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그가 떠났을 때의 상황과는 크게 달라졌다는 것 역시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만 가족과 두 번 상봉한 후, 루보이는 거의 말을 잃은 채 지내다 반 년 후 88년 서울에서 사망한다. 서울의 가족들은 그의 유해를 화장해 대만에 보냈고, 유해는 대만 천주교회의 어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사망 후 뒤늦게 대만에서 알려지고 기념된다.



루보이의 한국 아들 노유혁(盧維赫)이 2016년 타이중을 방문해 타이중 시장으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모습. 
타이중은 27부대의 소재지였다.





아래의 여러 대만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사진 역시 아래의 출처에서 가져왔습니다.

投身二七部隊 夫盧伯毅再沒返鄉 (27부대에 투신했던 남편 루보이,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다)

228悲歌 消失40年的父親難忘米粉滋味 (228의 슬픈 노래 - 40년간 실종되었던 부친은 미펀(米粉)의 맛을 잊지 못했다)

《台灣獨立運動的先聲:台灣共和國》 (대만 독립운동의 효시: 대만공화국) (吳三連台灣史料基金會,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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