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대만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였던 원로 작가 바이셴융白先勇의 83년작 불효자(孽子)는 중화권 현대문학에서 처음으로 게이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룬 소설이었다.
당시 타이페이의 게이 크루징 장소였던 신공원(지금의 2.28화평공원)을 배경으로 했다.
발표 당시 바이셴융은 이미 너무나 유명했기에 「불효자」도 널리 읽혔지만,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품 비평 시 주요 소재인 동성애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기피되는 일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며 중화권 게이문학의 정전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어찌 보면 게이 정체성이라는 보편성을 띤(또는 표방한) 문학인 동시에, 대만 외성인 가정의 삶, 아들을 군인으로 출세시키려는 아버지의 뜻을 동성애자로서 저버린 '불효자' 주인공, 7-80년대 대만-미국 관계를 다룬, 매우 대만적인 문학이기도 하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바로 중화민국의 군벌이자 장개석 천도 시기에 대만에 온 바이충시白崇禧였다. 바이셴융은 본인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바 있으며(출처), "아버지와 그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관용을 보여주셨을 거라 믿는다"라고.
「불효자」는 이후에도 영화, 드라마(03년: 왼쪽), 연극 등 여러 번 재해석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Crystal Boys라는, 원제와 다른 제목으로 출간(1989년: 오른쪽)되었다. 한국에서는 바이셴융의 대표작이 소수 번역되었지만 이 소설은 번역본이 없다.
드라마는 다음 링크에서 전부 볼 수 있는데, 영어 및 기타 언어 자막이 있다.
며칠 전 대만에서는 사법원(사법부 최고 기관)에서 '동성혼을 금지하는 것이 위헌이다'는 헌법 해석을 내려서, 대만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 있다. 이 위헌 판결에 따라 대만은 늦어도 2년 내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성뿐 아니라 동성도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법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대만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적 가깝지만, 현재 동성애자 인권에 있어서만큼은 대만과 한국은 정말 큰 차이가 난다. 그 '이유'를 따지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 한국에 비해 대만은 예전부터 동성애자를 사회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수용도가 훨씬 컸다는 게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문학만 해도, 바이셴융이 80년대에 이런 도발적인 소설을 쓰고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도 대만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로 '정전화'되는 동안, 한국 주류 문학계에서 동성애자들의 삶을 주된 소재로 왜곡하지 않고 높은 문학적 완성도로 그려낸 작품이, 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문학에 담아내고 사회에서도 표출한 작가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광수의 윤광호도 있긴 하지만...)
(*트위터에 쓴 글을 정리하여 다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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