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 젠더, 인종, 계층의 경계를 넘어 (2005)
9장 한류와 '친밀성'의 정치학에서 발췌.
‘한류’의 성공을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한국 대중문화가 소위 가족 중심주의와 장유유서 등 유교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친근감을 준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아시아 문화의 동질성이나 아시아적 가치의 공통성에 기반을 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새롭게 세력화되고 있는 아시아 신중산층 여성들의 욕망의 ‘동시성’에 기인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스티븐스(Stivens, 1998)는 경제적 풍요 속에 등장한 아시아의 신중산층의 근대성에 대한 체험을 성별 불안정성gender instability이란 개념으로 분석한다. 성별 불안정성은 전형적인 성별 역할이나 성별 구도를 변화시킬 만한 경제력을 갖추기 시작한 중산층 여성들이 기존의 젠더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새로운 남녀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상의 ‘이동’ 단계라고 할 수 있다. 242
이후에 수입된 『미망』 등 몇 개 안되는 한국 드라마들은 대부분 6.25전쟁 등 과거를 다룬 것들이었고, 대만인들이 가졌던 한국의 이미지는 ‘대남자주의’大男子主義와 ‘가난’이었다고 한다. 여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여자를 무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한국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물질적 ‘저발전’이 곧 정신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대만에서 한국 드라마 소비 방식은, 지역적 근접성과 인적, 물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모방할 만한 문화적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고, 한국의 경제 모델에 대한 선망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텍스트인 TV 드라마는 대만 사회에서 중국인의 지나온 과거를 반영하는 것, 또는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적 ‘속도’와 남성 중심주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대한 이미지는 1999년 이래로 대만에 수출된 한국 ‘트렌디’ 드라마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했다. 이동후(2003:134)는 한국 트렌디 드라마를 일본에서 ‘수입된’ 장르로 정의하고, 트렌디 드라마는 “영상 세대의 기호를 충족하고 외모 중심의 신세대 스타에 의존하며 유행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드라마 장르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유행한 트렌디 드라마는 1990년대 이후 부상한 신세대의 새로운 문화적 취향이 반영된... 247
또한 「불꽃」은 그 결말이 ‘여성이 가족으로 복귀하거나 처벌을 받는’ 전형적인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신여성주의’를 표방하는 드라마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불꽃」의 인기를 몰아 한국적 트렌디 드라마의 입지를 굳히는 데 공헌한 드라마는 「가을동화」다. 「가을동화」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소설로 각색되었을 뿐 아니라, OST도 인기를 얻었다. 그 이후에 우후죽순으로 수입된 모든 트렌디 드라마들은 공통적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 남녀의 낭만적 사랑이 중심적인 이야기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성별’ 이미지는 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을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드라마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잘생긴’ 남자들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이제 한국 사회가 ‘대남자주의’ 사회에서 ‘신여성주의’ 사회로 변화했음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249
[연]애뿐만 아니라 돈이나 경제적 문제가 주요한 갈등 관계로 등장하는 대만 드라마에 비해, 여전히 연애와 사랑이 최고의 가치로 등장하는 한국의 트렌디 드라마들이 그만큼 여성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이런 현상을 신여성주의란 말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때, 신여성주의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하나로 ‘성별’ 갈등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사유 방식을 제공하는 페미니즘 텍스트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여전히 가부장적 환상에 근거한 성별 전형성을 기본으로 한다. 250
2005년 책이기 때문에 지금(17년) 한류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70년대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지금의 젊은 한국 사람들이 봐도 놀랄 정도로 가부장적으로 그려지는데, 직업이 있는 여성도 드물고, 남성에게 신체적으로나 성적 폭력을 당하는 장면도 빈번히 더구나 별일 아닌 듯 등장한다. 여자 대학생은 많지만 결혼 후 직업이 있는 여성도 드물다. 그에 비해 70년대 대만을 풍미한 경요瓊瑤 소설 원작의 로맨스 영화를 보면 젊은 여성이 다양한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고,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하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그려진다. 물론 경요 소설에는 지금의 한국 드라마가 그렇듯 판타지라는 성격이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동시대의 한국에선 이런 '젊은 여성 대상'의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는지부터가...
지금도 대만에는 여전히 한국의 마초주의에 대한 인상이 있는데, 단적으로는 '오빠'라는 단어를 통해 한국적인 마초주의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래도 이 글에서 말하는 수십년 전 한국의 폭력적인 가부장주의와는 다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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