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빅토르 초이의 그룹 키노(Кино)가 소련 전역의 슈퍼스타로 성장했을 때 잠시 그의 홍보 담당자 및 프로듀서를 맡았던 유리 아이젠슈피스(Юрий Айзеншпис). 

그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초이와 당시 고려인 커뮤니티의 관계에 대한 대목이 있다.


Наши созвоны и встречи стали регулярными. Обычно вечерами мы втроем ходили куда-то поужинать. Особенно Цой уважал небольшой семейный корейский ресторанчик, открывшийся в конце 88-го около эстакады на Красносельской. Цоя там любили и почти обожали, ведь он представлял корейскую нацию (отец кореец, мать русская), являлся земляком, светским и талантливым человеком. Кстати, не только в Москве, но и на гастролях нас нередко разыскивали в гостиницах представители корейской общины и приглашали в свои национальные заведения, которые активно открывались на волне кооперативного движения. Когда дело доходило до того, чтобы расплатиться, денег не брали, а ведь нередко мы приходили вместе с музыкантами — до 8 человек. Это и в русских ресторанах случалось, и даже пока Цой еще не стал мегазвездой! Вообще наблюдалось куда больше почтения к исполнителям. А сейчас деньги сдерут по полной, еще и обсчитают. В лучшем случае пошлют бутылку шампанского на стол. Да уж, времена меняются, и не всегда в лучшую сторону.

(출처 https://biography.wikireading.ru/175497)


간단히 요약하자면 초이가 모스크바에 있는 한 고려인 식당을 특히 즐겨 찾았으며 그 식당에서 초이가 정말 환영받고 거의 숭배되었는데, 사람이 좋고 재능있었을 뿐 아니라 '한국계'의 대표로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키노가 투어를 다닐 때 소련 각 지역에 있는 고려인들의 숙소를 이용했으며, 초이는 그 당시에는 아직 슈퍼스타가 아니었음에도 어디서나 환영받고 고려인들이 한국계인 초이를 자랑스러워해서 돈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민족과 문화가 다른 러시아/중앙아시아 땅에서, 고려인들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초이 역시 당시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주제에 관해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으면 좋을 텐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서 아쉬울 뿐이다.

초이의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였던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Q&A에 따르면 초이는 자신의 한국 혈통에 관심이 있었으며(어떤 관심이 어떻게 있었는지 누그마노프가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음) 한국 음식을 요리하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음악 커리어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공연도 갔었다. 역시 누그마노프에 따르면 사망 당시에는 일본 밴드 Southern All Stars와 조인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한국 공연 역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빅토르 초이가 구소련권의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오늘날까지 시대의 아이콘으로 숭배되는 것을 보면, 그의 음악에서는 그 지역 대중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지역적 보편성을 우선적으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초이라는 개인이 한국계/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서 살아온 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 역시 흥미로운 일이긴 하다. 





이 잡지는 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고려인 잡지 <고려사람Корё сарам>의 '빅토르 초이 특집호(92년 4월)'이다.

수십 페이지 전체가 초이의 가족과 삶, 죽음, 사후 추모 분위기 등에 대한 글이다.

이 '초이 특집호' 뿐 아니라 <고려사람> 잡지 전문 PDF 파일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링크)

AND



지난 토요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 행사 일환으로 전개된 [나는 고려인이다] 공연.


1937년 연해주부터 2017년 광주까지 고려인예술가들의 삶과 사랑의 대서사시로 강제이주 열차 위에 함께 탑승하여, 1930년 조명희, 1938년 강태수, 1958년 정추, 1980년 최빅토르, 그리고 2017년 고려인 마을의 김블라드미르 시인까지 그들 고려인의 역사를 고려예술인들의 시와 음악, 춤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공연 소개 홈페이지: 링크





핸드폰으로 간단하게 촬영한 영상 몇 개를 올립니다.




고려인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함께 그 유명한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을 부르는 것이 인상깊었지만...

윤도현 씨가 번안한 한국어 버전으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어로 부르는 거야 의의가 있지만, 이 번안 버전의 가사가 원곡에 비하면 정말 조악하고 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Виктор Цой라는 사람의 한국어 표기 문제.

현재 한국에서는 민족주의적 시각('해외에서 성공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지양하기 위해 빅토르 최보다 빅토르 초이라고 부르는 분위기도 약간 있는데,

한편 고려인들은 한국어 표기를 할 때 빅토르 최, 심지어 최빅토르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인도 사실 생전에 고려인 커뮤니티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빅토르 초이와 고려인 커뮤니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시길)

다양한 표기방식이 다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여성들로 구성된 무지개중창단이 부르는 러시아 노래 [모스크바의 밤Подмосковные вечера]



아 이거 어디서 들어본 곡인데 도저히 기억이 안 난다. 혹시 곡명을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순서로는 공연자들이 다 같이 무대에 올라 [고려 아리랑]을 불렀다.

[고려 아리랑]은 원래 있던 민요가 아니라 굉장히 최근에 작곡된 곡인데, 선율 자체도 의도적으로 한국 전통 민요보다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익숙할 만한 선율을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의의 있는 공연이었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아주 완벽하진 않았는데, 공연에서 고려인들의 서사가 너무 단편적으로 전달된 것 같았고, 공연 곡명도 가르쳐 주지 않는 등 짜임새가 약간 미비한 측면이 있었다. 1시간 반 동안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은 원래 이런 것일지, 아니면 좀 더 정교해질 수 있었을지...

고려인들의 서사에서 항일 독립운동이 엄청나게 강조되었는데,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한국 사회에 동화되고 싶은 '약자' 고려인들의 처지가 반영된 것일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좀 들었고... 항일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 평가 및 존경받을 일이지만, 사실 모든 고려인들이 항일운동을 하러 연해주에 간 것은 아니었고 모두가 그래야 했을 필요는 없는데,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항일운동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지...

AND



광주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관련 행사를 여러 개 진행한다고 해서 방문했다.

전시 공식 홈페이지: 링크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그 옆의 구 전남도청 건물.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라고 들었다.




작은 규모의 전시장이지만 어느 정도 관람할 내용이 있다.




다큐 영화 [고려 아리랑]에도 소개된 고려극장의 배우들.





고려인 언론.




광주 고려인마을의 고려인들이 참여하는 좌담회가 있어서 들어 볼까 했는데,

막상 가 보니 관계자들이 아니면 자리를 차지하기가 좀 어색한 상황이라 금방 나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