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의 TV채널 公視에서 2011년 방영한 대만 대중음악사 다큐멘터리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聽時代在唱歌)] 번역입니다. 개인 공부 목적으로 올립니다. 본 포스트는 그 중 제3부인 1970-81년의 대만 대중음악사를 다룹니다. 제3부는 영상이 네 개로 나눠 올려져 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pts.org.tw/ptsing/page_1970_1981.htm
音樂產業大事記 음악 산업 연대기 | |
1971年 |
대만이 연합국을 탈퇴하다. 중화방송(華視) 개국하다. 콜린(歌林/Kolin) 레코드 설립되다. 홍샤오챠오(洪小喬)가 진행한 TV 프로그램 「금곡장(金曲獎)」이 '미스 금곡' 홍샤오챠오와 함께 인기를 얻다. 위광(余光)이 매주 토일 황금시간대에 대만방송(台視)에서 「청춘의 선율(青春旋律)」을 제작 및 진행하다. 신흥 가수와 합창단이 미군 클럽과 레스토랑(西餐廳)을 무대로 하다. 빌리(比莉), 추이타이징(崔苔菁), 황잉잉(黃鶯鶯), 쑤뤼(蘇芮) 등이 모두 고정 가수가 되다. |
1972年 |
'십대건설(十大建設)' 계획이 단행되다. 콜린 레코드(歌林唱片)가 華音關係企業을 설립하고 금곡장(金曲獎)을 만들며, 또한 중광(中廣)과 함께 전국에서 「콜린의 스타(歌林之星)」를 선발하다. |
1975年 |
장개석 총통 서거. 《대만정론(台灣政論)》 창간. 양셴(楊弦)이 타이페이 중산당(中山堂)에서 「현대 민요 창작 콘서트(現代民謠創作演唱會)」를 열어 현대시와 민요(포크 음악)를 결합하다. 대만 롤링스톤 지(滾石雜誌)는 양셴, 위광중 등 여러 명을 초빙해 「현대 시인과 민가(民歌) 가수의 대화록」 좌담을 열다. 음반사가 TV를 통해 신곡을 홍보하는 현상이 두드러져 이에 대해 신문국(新聞局)이 TV에서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의 곡 수를 제한하다. |
1976年 | 행정원(行政院)에서 오락 프로그램에서 부르는 노래 중 1/3 이상을 애국가요, 예술가곡 및 선택된 가요로 배정할 것을 방송 3사에 일제히 지시했다. 제일 레코드(第一唱片)에서 서독의 최신형 커팅 머신을 구입하면서 대만의 음반공업 기술이 구미와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되다. 소니의 투자로 싱코 레코드(新格唱片)이 설립되다. 동남아 지역에서 해적판이 성행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대만의 해외 음반 시장이 수축되었다. 교육부가 각 학교에 애국가요 「매화(梅花)」를 부르도록 일제히 지시했다. 리솽저(李雙澤)가 담강대학(淡江大學)의 서양 민가 콘서트에서 우리 스스로의 노래는 어디 있는지 의문을 던졌고, 이것이 민가 운동의 그 유명한 「담강 사건」이 되었다. |
1977年 |
필립스에서 CD를 출시하다. 천다(陳達)가 타이페이에서 민속 가요 음악회에 참가하다. 二秦二林(*진씨 두 명과 임씨 두 명: 1970년대 대만 영화계의 4대 배우를 가리킴) 부상하다. 츙야오(瓊瑤)의 三廳式 영화(*츙야오 각본의 영화가 대개 거실, 식당, 카페를 배경으로 함을 가리키는 용어)와 그 주제곡이 크게 흥행하다. 리타이샹(李泰祥)의 《향토민요(鄉土民謠)》 앨범이 20만장 가까이 팔리다. 콜린 레코드가 녹음실을 설립하여 음반사가 녹음실을 설립한 선례를 만들다. 운문우지에서 우추추(吳楚楚)의 첫 개인 콘서트를 열다. 타오샤오칭이 중산당에서 민가 가수들의 공개 콘서트를 열다. 「금운장(金韻獎)」이 신설되어 캠퍼스 민가가 시장에 진출하다. 리솽저가 단수이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익사해 28세로 요절하다. |
1978年 |
카세트 테이프가 보급되다. 디지털 레코드가 세상에 나오다. 대형 레코드에서 저마다 신형 커팅 머신을 구입하며 음반의 품질이 상승한다. 하이샨 레코드에서 《민요풍(民謠風)》 시리즈 음반을 출시하다. 국내 음반 산업이 국외의 합법적인 대리권을 찾기 시작하다. 쉬창후이(許常惠)가 「대만 전 성(省) 민중음악 조사대」를 조직해 대만 섬 전역을 돌며 민요를 채집하다. 양주쥔(楊祖珺)이 롱싱 공원(榮星花園)에서 「청초지 음악회(青草地演唱會)」를 개최했는데 이는 대만 최초의 대규모 노천 음악회였다. 천다가 운문무집(雲門舞集)의 작품 《薪傳》을 위해 〈사상기(思想起)〉를 녹음하다. 가오링펑/고릉풍(高凌風)이 부른 〈아가씨의 보조개(姑娘的酒窩)〉가 코러스 「胡搞瞎搞」 때문에 여론의 공격을 받고 신문국이 이에 경고를 내리다. 5대 대형 회사가 각자 대만 현지 회사와 음반사를 설립하다. 금현장(金鼎獎)에서 처음으로 음반 부문을 만들다. |
1979年 |
소니의 '워크맨'이 출시되다. 대만어 가요 창작자 리린치우(李臨秋)가 세상을 떠나다. 타이페이 시의원이 '일본 가요가 대만 가요계에 범람하는 현상'에 의문을 표하다. 중화방송(華視)이 「예능 100(綜藝一百)」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방영하다. 양주쥔이 「新聲綜藝團」을 조직해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 운동을 추진하다. 방송처(廣電處)가 '예능 프로에서 정화가요를 1/3 불러야 한다'는 규정을 취소하다. 류자창(劉家昌)의 〈중화민국송(中華民國頌)〉과 허우더젠(侯德健)의 〈용의 후예(龍的傳人)〉가 대만 전역에서 널리 불리다. |
1980年 |
레이저 CD가 출시되고, 이전에 앨범이 여러 가수들의 합작으로 발매되던 것이 가수 개인 앨범 발매 추세로 바뀌다. 중국 대륙에서는 덩리쥔(鄧麗君) 열풍이 불며 "덩샤오핑 대신 덩리쥔이 필요하다"는 말이 널리 퍼지다. 폴리그램 레코드사가 대만에 사무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당시 대만에서 유일하게 사무소가 있는 음반 기관이었다. 민생보(民生報), 중광(中廣), 경찰방송(警廣)과 중화방송이 공동으로 「창작 가요 랭킹(創作歌謠排行榜)」 투표를 진행하다. 「민풍악부(民風樂府)」 결성되다. |
1981年 |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유행으로 카세트 테이프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LP와 카세트 간의 비율이 몇 년 전의 7:3에서 3:7로 바뀌다. 홍콩 드라마 〈초류향(楚留香)〉이 크게 유행하다. 일본의 소니와 네덜란드의 필립스 사가 CD 개발이 완료되었음을 공동으로 선포했고, 레이저 CD가 대만에서 출시되었다. 락 레코드(滾石唱片)가 설립되다. 금운장(金韻獎) 개최가 중단되었는데, 당해까지 모두 5회 개최되었으며 10장의 앨범을 냈다. 페이링 레코드(飛鈴唱片) 설립되다. 《민요풍(民謠風)》은 1978년부터 매년 1장의 앨범을 냈는데 모두 4장을 냈다. 천피더(陳彼得)가 서양의 댄스곡에 국어 가사를 다량 입히며 가요 편곡에 자극이 되다. 콜린 레코드에서 아이돌 진루이야오(金瑞瑤)와 그녀의 히트곡 〈너에게 날아, 나에게 날아(飛向你飛向我)〉를 홍보하다. |
프로그램 소개글
1973년 신문국은 「행정원 신문국 방송 및 텔레비전 가요 지도 팀」을 설립했고, 이 곳에서는 8천 곡에 달하는 대중가요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우수 가요를 선발했다. 1971년 「홍젠추안(洪建全) 교육문화기금회」가 설립되었고 1975년에는 「홍젠추안 시청도서관」에서 각종 도서, LP, 카세트 테이프를 소장하여 일반인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제공하였다. 이 모두가 음반 산업이 사회 대중의 문화, 오락 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0년대의 중미단교 사건(*자유중국과 미국의 단교)을 통해 대만 민중은 민족의 자존감에 대한 자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본토 문화에 대한 각성 역시 시대 상황 아래서 긴급히 이루어졌다. 양셴(楊弦), 후더푸(胡德夫), 리솽저(李雙澤) 등이 이후 대만 전역을 휩쓴 「현대 민가(現代民歌)」 운동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5년 양셴과 후더푸는 위광중(余光中), 쉬즈모/서지모(徐志摩)와 같은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타이페이 중산당에서 「중국 현대 민가의 밤」 콘서트를 열었다. 이는 캠퍼스 민가 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으로서, 이 날의 콘서트에서 선보인 노래 9곡은 모두 양셴이 같은 해 발매한 그의 첫 앨범 「중국현대민가집(中國現代民歌集)」에 수록되었고 이 앨범은 민가 운동의 공식적인 시작, 민가 시대의 개막을 알리게 되었다. 「중국 현대 민가」에서 파생된 「캠퍼스 민가」는 이후 오히려 음반사에 의해 주도되는 형태가 되었으며, 상업성을 띤 「금운장(金韻獎)」 창작 가요 콘테스트는 모두 대만 대중가요에 있어 역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당시 젊은이들이 창작 가요 붐을 일으킨 것이 대만 대중가요의 정초를 닦고 가요계의 인재를 배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대표곡: 迴旋曲、鄉愁四韻、西出陽關、美麗島、鄉愁、思想起、美麗的稻穗、龍的傳人、橄欖樹、歸去來兮、小雨來的正是時候、千言萬語、往事只能回味
이 시기의 대표 가수: 陳明韶、胡德夫、張艾嘉、李建復、吳楚楚、鳳飛飛、黃鶯鶯、崔苔菁、劉文正、鄧麗君、甄妮、姚蘇蓉、李建復、尤雅
방송 내용
[바람이 내게 알려주네(風告訴我)]
작사, 작곡: 치우천(邱晨)
노래: 천밍샤오(陳明韶)
가을의 미풍 속에서 우리는 천밍샤오의 목소리를 듣는다. 천밍샤오는 제1회 금운장(金韻獎)에서 1등을 수상한 가수이다. 2011년 지금, 제1회 금운장이 열린 1977년으로부터 34년이 흘렀다.
[천밍샤오/민가 가수]
"그 때 한 친구가 '너 노래 잘 하니까 응모해 봐도 되겠다'고 했어요. 우리 예전의 기차표에는 사진이 있었잖아요? 친구가 그 사진을 뜯어서 자기가 대신 신청을 해 줬어요."
"5등부터 시작해서 수상자 발표를 했는데, 그 다음 4등, 3등, 2등... 그래서 저는 '아 이제 틀렸구나' 했죠. 그리고 제일 나중에, 그 때 제가 여동생하고 같이 갔는데, 여동생은 응원해주러 왔고요. 1등은 여학생 한 명과 기타 한 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여동생이 바로 펄쩍 뛰었죠. 주위 사람들이 다 저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스스로 반주를 한 사람이 저밖에 없었거든요."
금운장으로 대표되는 캠퍼스 민가 붐은 70년대 대만 대중음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모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의 입에서 나온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라는 구호는 사실 70년대 초기부터 대만 대중가요 산업에서 조금씩 실현되고 있었다.
[안개처럼 또 꽃처럼(像霧又像花)]
작사: 좡누(莊奴)
작곡: 구위에(古月) (줘홍위안 左宏元)
노래: 야오수롱(姚蘇蓉)
1970년
야오수롱은 대만에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창법을 발전시킨 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연극성이 충만한 목소리와 과장된 손짓으로 대만 본토에서 창작된 노래를 불렀다. 그녀 이전 대만의 대중음악계는 항상 상하이, 홍콩, 일본의 창법을 모방하곤 했다. 그녀 이후 대만에서는 독자적인 새로운 창법이 생겼을 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기도 했다.
[구이린청청(桂林琤琤)/하이샨 레코드 창립자]
"저희가 해외 사업을 하게 된 건 야오수롱 씨 때부터였어요. 싱가폴에서도 저희를 찾았고 말레이시아에서도, 홍콩에서도 저흴 찾았죠. 이전에는 가수가 공연을 통해서 돈을 벌었지만 저희는 녹음할 때 야오수롱 씨를 데려와서 꼭 녹음을 시켰어요. 야오수롱 씨는 어떨 때는 저녁에 열여덟 곳을 뛰었는데, 그렇게 계속 여기저기 무대를 뛰고 나면 거의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끝났어요. 그 다음에 바로 녹음실에 와서 노래를 했죠. (웃음)"
[시에레이(謝雷)/가수]
"그 때는 반드시 외부 공연을 해야 했어요. 노래 무대(歌廳)이든 식당이든. 저는 타이페이에서 하루에 공연을 네 곳 뛰었죠. 위엔환(원환/圓環)에 궈셩호텔(國聲酒店)이 있었는데 거기나, 진선미 무대(真善美歌廳)나, 공연 두 번에 宵夜가 한 번 있었어요. 그러니 그 때는 그렇게 공연을 뛰어야 수입이 있었죠. 왜냐하면 음반은, 아시겠지만 1장에 만 원이라고 해도 앨범을 한 장 녹음하는 건 정말 가끔씩이잖아요."
[쓴 술을 잔에 가득(苦酒滿杯)]
작사: 션즈(慎芝)
작곡: 야오잔푸(姚讚福)
노래: 시에레이
1967년
하이샨 레코드(海山唱片)는 당시 가장 성공한 레코드사였다. 여기 소속된 시에레이, 야오수롱, 요우야(尤雅) 등은 모두 흥행 보증 수표였다. 그 중 시에레이는 [쓴 술을 잔에 가득]으로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엄청난 흥행을 했고, 게다가 하이샨 레코드의 맹주 자리를 얻게 되었다.
[구이린청청]
"저희가 [쓴 술을 잔에 가득] 음반을 처음 제작할 때부터 대히트였죠. 당시 음반 판로는 다양하지 않았는데, 저희가 종이 1500장을 한 림(rim)으로 계산하잖아요, 그러면 50림 정도면 거의 7만 5천 장이고, 그러면 상당한 거죠. 시에레이 그 앨범이 거의 백, 이백 림 정도 팔렸어요. 그러면 거의 2, 30만 장이죠."
[시에레이]
"장화(彰化)에 레코드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 사장이 '이렇게 (시에레이의) 레코드를 많이 팔았는데 시에레이를 직접 만나고,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어보는 게 유일한 내 소원이다. 들어줄 수 있겠냐'고 하이샨에 부탁을 한 거예요. 그래서 하이샨에서 이야기를 듣고 제가 '되죠, 왜 안되겠어요' 했어요. 그 레코드 가게 한 곳에서 4만 장을 넘게 팔았어요."
[구이린청청]
"다른 사람들이 도용을 했죠. 사람들이 커버 곡 부르듯 다른 가수를 불러서 이거랑 똑같이 부르게 시켰거든요. 정식 음반회사에서도 이렇게 했고 게다가 밤에 하는 지하 해적판은 더 많았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물건을 파는데 다 합해 보면 그 사람들의 반 정도만 팔았어요. 그 때부터 제가 저작권을 신청했죠. 노래, 그리고 가사도 같이요. 당시에 저작권을 신청하려면 노래책(歌本)을 만들어야 했어요. 번거로운 일이었죠. 글자도 입력해야 하고 그걸 또 인쇄해야 하고."
[수많은 말(千言萬語)]
작사: 얼잉(爾英)
작곡: 구위에(古月) (줘홍위안 左宏元)
노래: 덩리쥔(鄧麗君)
1973년
대만 현지에서 창작된 노래가 팔려나가면서 대만 현지의 작사 및 작곡가들도 부상하기 시작했다. 줘홍위안은 당시 엄청난 주목을 받는 작사/작곡가였는데, 덩리쥔의 [수많은 말]이 바로 줘홍위안의 작품이었다.
또다른 스타 창작자 류자창(劉家昌)이 쓴 [지난 일을 다만 회상할 뿐(往事只能回味)]는 1970년 대만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노래였다.
[지난 일을 다만 회상할 뿐]
작사: 얼잉(爾英)
작곡: 류자창
노래: 요우야
1971년
[구이린청청]
"그 때 요우야가 회사에 와서 제가 (류자창에게) 요우야한테 곡을 좀 주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알았다고 했고요. 그래서 [지난 일을 다만 회상할 뿐]을 요우야에게 써 주게 된 거죠. 바로 궈빈(國賓)에서였어요.
저희가 류자창에게 작곡을 맡기고, 류자창은 요우야에게 노래를 시켜보려고 해서 저희가 류자창에게 커피 대접을 했어요. 커피 밑에 까는 종이가 있었어요. 궈빈에서 커피 밑에 종이를 깔아서 준 건데, 류자창이 거기에 뭘 막 그려서 '자, 여기 한 장' 하고 주면서, '한 장에 십만 원, 십만 원' 이러는 거예요. 노래 한 곡에 십만 원이란 거였죠(웃음). 하지만 그 사람이 우리한테 던져 준 그 노래는 확실히 영화에 삽입될 노래였어요."
"흰 종이에 [요우야 '지난 일을 다만 회상할 뿐']이라고 써서 목 앞에도 종이를 걸고, 목 뒤에도 걸고, 대여섯 명이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시에레이]
"나중에 요우야의 그 [지난 일을 다만 회상할 뿐] 노래 때는 '그룹'이 있었어요. 라디오 방송국하고 계약을 해서, 라디오 방송국 여러 곳에서 전부 매일 이 노래를 틀었죠. 규정을 만들어서 30분에 한 번은 이 노래를 틀자는 게 있었어요. 그 조건이 어땠는지는 저는 모르고, 음반사하고 방송국이 이야기를 한 거죠. 엄청나게 효과가 있었어요. 바로 히트하고 바로 인기를 끌었죠. 펑페이페이(鳳飛飛) [행복하길 바랄게요(祝你幸福)]도 그랬어요. 그런 식으로 갔어요."
1972년 3월 하이샨 레코드는 펑페이페이의 첫 앨범 [행복하길 바랄게요]를 발매했고, 앨범은 즉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행복하길 바랄게요]
작사: 린황쿤(林煌坤)
작곡: 린자칭(林家慶)
노래: 펑페이페이
1972년
[펑페이페이 TV 인터뷰]
"저는 어릴 때부터 노래에 정말 관심이 많았고요, 음악에 조예가 깊은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정도 때부터 방송국이나 극장의 노래 대회에 참가했어요."
[우연(巧合)]
작사: 좡누(莊奴)
작곡: 토니(湯尼)
노래: 펑페이페이
1975년
펑페이페이의 부드러운 음성, 소박하고 평이한 옷차림, 그리고 대만 국어의 억양은 많은 대만 사람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경제 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지던 1970년대, 대만은 펑페이페이의 노래에서 자기 자신의 노래를 찾은 것이다.
70년대의 대만은 비관과 낙관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순수함과 복잡한 세상 살이의 노련함이 뒤얽히던 시대, 1969년의 댜오위타이 사건, 1971년의 UN 퇴출, 1973년의 석유 위기, 1975년 장개석 서거 등은 대만 사회를 한 바탕 폭풍우 속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십대건설(十大建設) 계획, 가내식 공장, 수출 가공구의 설치, 10년 동안 계속된 10% 이상의 경제 성장률 등을 통해 대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경제성장 및 번영에 따라 대중음악도 라디오, 인쇄업 등 관련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천롱롱(陳榮隴)/용푸 전자회사(永福科電) 공장장]
"왜냐하면 당시에 라디오는 우리가 빨리 개발했고, 게다가 수입을 많이 했거든요. 그 때 점점 라디오가 많아지면서 가격도 점차 보급화가 됐죠. 생산량이 판매량을 따라잡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전자기기 판매점에선 우리가 테스트를 하기도 전에 제품을 싸 가서, 판매점에 가서 테스트를 해 보고 되겠다 싶으면 바로 팔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그 땐 다들 앞다퉈서 사려고 했었거든요."
[천자오슝(陳昭雄)/홍란인쇄(紅藍印刷) 사장]
"음반사에서 처음에 사용한 건 종이 포장이었어요. 대개 350파운드의, 저희가 양면 코팅판(*白銅版卡)이라 부르는 걸 썼고요, 사이즈는 아마 삼십몇센치, 35센치였나. 네모 반듯했고요. 그리고 앨범 디자인으론 보통 사람의 두상을 썼어요. 그래서 처음에 저희가 음반 제작을 할 때는 사진사를 찾아서 가수들 사진을 찍고, 그리고 디자인을 맡기고, 판을 제작하고, 그 다음에 인쇄하고, 중요한 건 인쇄한 다음에 가공을 해서 봉투로 만들어야 했어요. 민국 60년에서 70년까지, 맞죠? (*민국 60년=1971년) 그 때는 말하자면 황금기였고, 주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매일 24시간을 음반 겉봉을 만들고 있었죠."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전환하며 민생 경제가 나아지고 있던 70년대, 야오수롱, 덩리쥔, 시에레이, 제니(甄妮), 펑페이페이, 류원정(劉文正), 요우야, 추이타이징(崔苔菁), 황잉잉(黃鶯鶯) 등의 인기 가수들은 대만 가요계의 총아로서 음반 및 오락 프로에서 활약했다. 양대 음반사였던 하이샨과 콜린(歌林)은 이들 스타들과 앞다투어 계약을 맺고 앨범을 출시했다. 음반마다 열혈 지지층과 높은 판매량이 보장되었다.
영화사에서는 적극적으로 가요계 스타에게 영화 주제곡을 맡겼고, 영화마다 감동적인 주제곡 하나씩은 있었다. 집집마다 모두 이런 영화 주제곡을 알고 있었고 노래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 중 영화 주제곡을 가장 많이 부른 것은 제니와 펑페이페이였다.
[구이린청청]
"자연스럽게 영화사에서는 작곡가를 찾아가서, '이런 영화가 있는데 불러서 작곡을 맡기자' 이렇게 되었죠. 작곡이나 녹음 등은 모두 작곡가가 음반사에 맡겼고요. 음반사에는 스타 가수가 모두 있었어요. 작곡가는 좋은 가수가 있어야만 음반 제작을 했어요. 제작 비용은 모두 음반사가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두 같이 일을 했죠."
제3부 (2)
[사랑의 길(愛之路)]
작사 및 작곡: 홍샤오챠오(洪小喬)
노래: 홍샤오챠오
1973년
당시 중국방송(中視)의 프로그램 [금곡장(金曲獎)] 사회자였던 홍샤오챠오는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방송에 등장했다.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고 또 청중들의 편지를 받으면 거기에 맞춰 현장에서 노래를 써 주기도 했다. 이런 창의적인 프로그램 내용을 통해 대중들도 대중가요 창작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
[홍샤오차오/가수 및 사회자]
"왜냐하면 저희 프로그램에 '답장 시간'이란 코너가 있었거든요. 아무때나 편지를 써서 보내면 편지에 있는 가사를 보고 제가 골라서 답장을 하는데, 매 번 편지 하나씩을 골라서 답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언어를 통해 답을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통해 답신을 했죠. 말하자면 시청자가 쓴 편지가 노래가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때 이 '답장 시간'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극을 받았어요. 그 때 편지를 배달받아서 저희 프로그램에서 받는데 편지가 천가방에 몇 개씩 들어 있었어요. 천가방으로 7-8개가 됐죠. 집배원들이 다들 싫어했어요. (웃음) '왜 이렇게 편지가 많이 와요?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요.'
프로그램이 환영을 받은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관중들이 제 프로그램에 참여를 했기 때문이었어요. 그 참여한다는 느낌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노래를 한 곡 썼는데 제가 그 사람한테 몇월 며칠에 이걸 방송에서 내보낼 거라고 통지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친구들을 막 불러모으지 않겠어요? 그래서 마을 전체 사람이 전부 그 사람 집에 모여서 '우와 니가 쓴 노래 나온다!'하고 다같이 이야기했죠. 저는 방송을 하면서 '어디 사는 누가 쓴 노래입니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생각해 보세요. 그 때 TV 방송국은 두 곳밖에 없었고, 그 때 막 개국했죠, 중국방송이요. 신나지 않았겠어요?"
대만 대중가요가 점점 본토화(현지화)되고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었지만, 젊은이들 중에서는 서구의 대중가요를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기타 한 대와 노래책, 복제판 서양 음반 몇 장이 바로 젊은이들의 마음의 양식이었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노래책은 홍콩 출신 화교 학생 양광롱(楊光榮)이 펴낸 책이었다.
[양광롱/민가 가수, 「민요기타집(民謠吉他集)」 편집자]
"민국 57년(*1968년), 그러니까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대만대학교에서 공부했는데요, 그 때 저희 반에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고 이 친구들이 합창단을 결성했어요. Virus란 이름이었죠. 당시 저희가 부른 노래는 대부분 소위 1960년대의 미국 Folk Revival 즉 '포크 리바이벌 운동' 때 나온 포크송이었죠. 다 영어였군요. 다들 잘 아는 Blowin' in the Wind 같은 노래요.
합창단 활동하면서 즐거웠고요, 저는 합창단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양을 수집하고 나니 '아 이거 괜찮네' 싶어서 손으로 쓴 편곡집을 만들었어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러지 말고 아예 책으로 인쇄하지' 하길래 저도 '그럼 뭐 인쇄하죠' 그랬어요. 그 책이 나오고 나니 듣기로는 인기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많은 학생들이 레스토랑(西餐廳)에서 이런 서양 포크송을 불렀다. 후더푸(胡德夫), 우추추(吳楚楚), 천밍샤오가 모두 당시 레스토랑의 고정 출연 가수들이었다.
[후더푸/민가 가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타이페이에는 젊은 사람들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때는요. 그 때는 아이디어 하우스(艾迪亞)도 없었고요, 음악을 들으러 가려면 돈을 많이 내고 밴드 음악을 들으러 가야 했어요. 뎬싱(電星)이나 궈빈 같은 곳은 젊은 사람들은 가질 못했죠. 거기는 장소 정리를 하지도 않아서, 저녁 내내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을 수도 있었어요."
[Today]
작사 및 작곡: Randy Sparks
노래: 장아이자(張艾嘉), 류원정(劉文正)
1975년
70년대 젊은이들의 아이돌 장아이자와 류원정도 모두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를 조직해 서양 노래를 불렀다.
[Today]
작사 및 작곡: Randy Sparks
노래: 장아이자, 후더푸
2007년
[장아이자/가수 및 감독]
"나이트클럽에선 밤마다 이런 밴드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서 서양 노래를 불렀어요. 젊은 사람들은 다들 정말로 이런 밴드를 엄청나게 좋아했죠. 대만에서 처음으로 체육관에서 열린 콘서트가 바로 저하고 류원정, 그리고 그 때 레이멍 합창단(雷蒙合唱團)의 기타리스트 등 저희 몇 명이서 연 콘서트였어요. 대담한 행동이었죠, 체육관에서 한 게. 엄청나게 긴장을 했어요. 왜냐하면 보통 때 중산당에서 콘서트를 하면 관중이 천 명에서 이천 명 정도밖에 안 되는데 체육관에는 5천 명 이상이 들어가거든요. 그래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당일이 돼서 보니 입구에 줄을 얼마나 섰는지, 사람들이 줄을 서는게 끝도 없이 계속 서가지고... 그걸 보니 많이 설레더라고요. 자랑스럽기도 했고(웃음)"
[양광롱]
"대학 때 외국에서 온 전도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이 노래를 잘 했어요. 기타 반주도 할 줄 알았고요. 그 분이 제게 미국 민요(포크송)를 소개해 줬고, 한 번은 그 분이 This land is my land 노래를 가르쳐 주셔서 같이 불렀죠. This land is my land~ This land is your land~ From California to the New York Island~"
"캘리포니아에서 뉴욕 아일랜드까지가 어떻게 제 땅일 수 있겠어요(웃음) 이게 어떻게 'my land'일 수 있냐는 거죠. 노래가 끝나고 나서 그 분이 제 어깨를 치면서 농담삼아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This land is my land!' 하는 거예요. 그 사람 땅이지 제 땅이 아니라고요. 그 순간에 사실 좀 어색했죠. 노래는 즐겁게 불렀는데 사실 그 노래의 내면은 전혀 보질 않은 거예요. 제 땅이 아니니까요(웃음)."
당시의 국어(중국어) 대중가요를 좋아하지도 않고 서양의 노래에도 만족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땅에 더 가까운 노래를 찾아내려 했다.
사진: 쉬창후이(許常惠), 천다(陳大)
1969년, 민족음악학자 쉬창후이와 스웨이량(史惟亮)은 대만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 땅의 현지 민요를 수집했다. 그들은 헝춘(恆春)에서 천다를 찾아냈다.
[사상기(思想起)]
작사: 쉬빙딩(許丙丁)
작곡: 헝춘 민요
노래: 천다
1971년
천다의 소박하고 세상의 풍파를 겪어낸, 그럼에도 생명력이 충만한 목소리는 대만 70년대 '자기 목소리 찾기'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1971년 홍젠추안 기금회에서 [천다와 그의 노래]가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우리 스스로의 노래'의 씨를 뿌렸다. 1976년, 허수아비 레스토랑(稻草人西餐廳) 사장은 경영난 타개를 위해 직접 헝춘까지 내려가서 천다를 타이페이로 영입해 와 레스토랑 고정 출연을 맡겼다. 이 때 연 콘서트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타이페이의 문학청년들이 천다의 목소리를 들으러 작은 식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후더푸가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다.
[후더푸]
"(천다가) 헝춘조(恆春調)를 불렀죠. 들으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 호기심을 갖고 왔어요. 다들 이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몰랐죠. '아 이게 헝춘, 헝춘조구나' 하는 것만 알았어요. 신문으로 홍보가 많이 되잖아요, 그 때 미술에 훙퉁(洪通)이 있었다면 음악엔 바로 천다였어요. 솽저(리솽저)가 천다 음악을 불러 줘서 듣게 됐네요."
제3부 (3)
[리솽저(李雙澤)/창작자]
종종 천다의 노래를 불러 후더푸에게 들려 주곤 했던 리솽저, 그는 앞서 이미 1972년에 후더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 자기 스스로의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고.
[후더푸]
"콜롬비아(可倫比亞)에서 제가 노래하는 걸 듣고 솽저가 저한테 그랬어요. [아름다운 벼이삭(美麗的稻穗)] 외에도, 저희 어머니가 파이완 족(排灣族)이니까 파이완 족 노래도 좀 배워서 돌아오는 게 어떻겠냐고. 아니면 좀 생각해 보면 부를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요. 리솽저가 저한테 [아름다운 벼이삭]을 불러보라고 했던 바로 그 때가, 노래가 끝나고 다들 일어나 박수를 치던 그 순간이 지금까지도 저한테 영향을 계속 주고 있죠.
솽저는 노래에 있어서만 저한테 영향을 준 게 아니라, 제가 생각을 해 보게 만들었어요. 이 베이난 족(卑南族) 노래(*[아름다운 벼이삭])가 제가 부르고 난 후 왜 그렇게 중요한 노래가 되었는지를요. 제 자신이 누군지 생각을 해 보게 됐죠. 이 도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인파 속에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베이난 족이라는 게 저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요."
리솽저는 후더푸를 위해 [아름다운 벼이삭] 콘서트를 열었다. 서양 노래를 부르는 외에도 원주민 노래도 함께 불렀다.
1976년, 담강 대학에서의 어느 콘서트 무대에서 리솽저는 콜라 한 병을 들고 무대에 올랐는데, 평소에 서양 노래를 즐겨 듣는 관중을 향해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의 노래가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
[장쉰(蔣勳)/작가]
"갑자기 무대에 올라서, 코카콜라 병을 들고, 이 콜라는 대만에서도 마시고 뉴욕에서도 마시는데, 밥 딜런도 대만에서도 부르고 뉴욕에서도 부르고, 그러면 우리한테는 우리 노래는 없네요, 이런 말을 했죠."
[후더푸]
"그 때 솽저가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해서 저도 깜짝 놀랐죠. 안 놀란 사람이 없었어요."
[량징펑(梁景峯)/리솽저의 친구]
"솽저가 그러고 나서 바로 대만 민요를 불렀어요. 그러고 나니까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죠. 그러니까 솽저가 화가 났죠. (웃음) 화가 나서 부른 게 [국부기념가(國父紀念歌)]였고요. 그러니까 야유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요. 나중엔 솽저가 '아 네, 서양 노래가 듣고 싶으신 거군요' 하면서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불렀어요."
[Blowing in the Wind]
작사 및 작곡: Bob Dylan
노래: 장아이자, 후더푸
2007년
[장쉰]
"사람들이 다들 야유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리솽저가 괜히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당시에 리솽저는 마음 속에 분명한 생각이 있었을 거예요. 어떤 사회에서 타인의 언어로만 계속 노래를 하면 노래가 보편적인 대중에게 가 닿지 못한다고, 영원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요. 이 쪽 방면에서의 생각이 우리보다도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알지(我知道)]
작사: 량징펑(梁景峰)
작곡: 리솽저
노래: 리솽저
1977년
리솽저의 외침은 담강대 교지 지면 상에서 열렬한 토론거리가 되었다. 이후 리솽저 스스로도 창작곡 [나는 알지]를 써 냈다.
[타오샤오칭(陶曉清)/캠퍼스 민가 운동의 기수]
"확실히 리솽저가 한 역할이 있어요. 그 이후에 토론이 벌어지면서 담강대학 학생들이 실제로 이 문제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거든요.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죠. 제 견해에는, 그 시기에 그런 분위기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콜라병 사건이 일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리솽저는 해변가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친구들은 그의 유품 속에서 사람들에게 제일 널리 알려진 그의 노래 [메이리다오/아름다운 섬(美麗島)]를 찾아 냈다.
[메이리다오]
작사: 천슈시(陳秀喜) 시/량징펑 개작
작곡: 리솽저
노래: 양주쥔(楊祖珺)
1979년
[메이리다오]는 앞서 1979년 양주쥔이 취입해 싱코 레코드(新格唱片)에서 발매한 적이 있었는데, 발매 후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헝춘의 천다, 단수이의 리솽저, 그 둘은 대만의 양쪽 끝에서 온 사람들이다. 한 명은 태평양의 음유 가수였고, 한 명은 대서양으로부터 고향을 찾아 돌아온 나그네였다.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대만 스스로의 노래'를 불렀다.
1975년 6월 6일, 타이페이 중산당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콘서트가 열렸다. 바로 양셴(楊弦)의 창작 민요 콘서트였다. 양셴은 위광중(余光中)의 시에 곡을 붙인 창작곡을 6곡 발표했다.
[양셴/민가 가수]
"당시에 위광중 시인의 [백옥여주(白玉苦瓜)] 시집을 읽었는데 운율이 고정된 시가 여러 편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시집의 시에 곡을 한 번 붙여보자 해서 단숨에 여덟 곡을 붙였죠. 그리고 1975년이 되어서 음악회를 하나 열었고요. 콘서트 전반부에는 라이셩촨(賴聲川)이나 후더푸 같은 사람들을 불렀고요, 저는 영어 창작 가요 부분을 주로 맡았죠. 후반부에서는 중국어 시에 창작 가요를 붙인 걸 발표했어요. 그래서 그 콘서트 이름이 [현대 창작 민요 콘서트]가 된 거죠.
그 날 비가 조금씩 내렸는데요, 그래서 콘서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어요. 나중에는 방송계에 있는 사람들도 왔어요. 타오샤오칭 씨, 젠징후이(簡靜惠) 씨, 웨이웨이 부인(薇薇夫人)도 왔고, 제가 기억하기론 정슈민(鄭淑敏) 씨 같은 사람들도 왔던 것 같아요. 시인들도 왔을 수도 있고요. 위광중 시인도 물론 콘서트에 초빙했죠."
[타오샤오칭]
"양셴 씨가 문화예술계 친구들을 많이 초빙했어요. 시 쓰는 친구들도 초빙했고요. 그러니까 사람들도 그 콘서트가 위광중 시인의 작품을 발표하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무대 아래 청중들의 기대도 좀 달랐죠. 그 콘서트는 야유를 받지도 않았고요, 제가 나중에 양셴 씨한테 콘서트 녹음해 둔 거 없냐고 물어보니까 저한테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 빌려 주더라고요. 거기서 노래 몇 곡을 골라서 방송에 내보냈죠. 전부 다 내보낸 건 아니고 제 생각에 괜찮다 싶은 부분을 몇 곡 골라서 방송에서 틀었어요. 그 때 저는 '에라 모르겠다, 욕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안 좋은 반응은 하나도 없고 다들 편지에서 '저도 곡을 쓴 게 있는데요' 아니면 '멋있네요. 이후에도 이런 노래를 계속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굉장히 좋네요' 하더라고요."
타오샤오칭이 중광(中廣)에서 진행한 중국 및 서양 민가 프로그램은 원래는 서구의 노래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양셴의 곡은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첫 중국어 가요였다. 곡이 전파를 탄 이후 의외로 열렬한 반응이 있었고, 많은 젊은 청취자들이 창작곡을 써 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시에 막 출시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자신이 쓴 노래를 녹음해서 타오샤오칭에게 보낼 수도 있었다.
[타오샤오칭]
"그 때 사람들이 곡을 써 보내면 제가 들었죠. 악보를 저한테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저야 사람들이 악보나 가사를 전부 같이 보내는 게 좋았죠. 가사만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뭐 다 괜찮았어요. 아무튼 테이프를 듣고 부른 노래가 퀄리티가 괜찮다 싶으면 바로 방송에서 틀었어요. 만약에 녹음을 한 게 퀄리티가 안 좋다 싶으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요, 하나는 가수 본인을 방송국에 불러서 직접 노래를 시켰고요, 만약에 본인이 노래를 잘 못 하면 노래를 잘 하는 다른 사람을 불러서 그 사람이 쓴 곡을 녹음을 시켰어요."
1975년 홍젠추안 기금회에서는 양셴의 창작 가요를 음반으로 제작해 발매했다. 음반명은 [중국 현대 민가집(中國現代民歌集)]으로 정해졌다.
[홍졘징후이(洪簡靜惠)/홍젠추안 교육문화기금회 이사장]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이 [중국 현대 민가집]을 발매했습니다. 발매 후의 판매 경로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요, 그 이전에는 앨범을 내면 모두 음반 가게를 통해서 팔고 상업적인 메커니즘에 진입하게 되었잖아요, 하지만 저희가 앨범을 '출판'한 건 말하자면 문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서점을 거쳐 출판을 하게 되면 구매를 하는 사람들도 역시 좀 다르죠."
[천밍샤오]
"저는 지룽(基隆)에 있었는데요, 라디오도 TV도 없었지만(웃음) 그 중국 민가 앨범은 샀어요. 기숙사에서 그 앨범을 틀어놓곤 했죠. 그 땐 LP 앨범하고 턴테이블이었잖아요. 그 앨범을 듣고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그 중에서도 회선곡(迴旋曲)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어요."
[회선곡]
작사: 위광중
작곡: 양셴
노래: 양셴
1975년
[천밍샤오]
"그 노래의 분위기나 감정이 우리 학생들하고 비교적 가까웠어요. 그리고 정말로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노래였죠."
양셴이 현대시(新詩)를 개작해 만든 곡을 발표한 후 대중가요계에는 현대시를 개작해 만든 곡이 등장하게 된다. 그 작곡가는 바로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뤄다유(羅大佑)였다. 그는 쉬즈모의 시 [노래(歌)]를 개작했는데, 이 곡 역시 영화 [빛나던 날(閃亮的日子)]의 삽입곡이었다.
[노래]
작사: 쉬즈모
작곡: 뤄다유
노래: 장아이자, 류원정
1977년
[장아이자]
"그 노래가 처음으로 뤄다유가 공개적으로 발표한 첫 작품이었어요. 그 때는 류원정하고 뤄다유가 친한 친구였어서 노래를 류원정한테 들려줬는데, 원정이가 되게 괜찮다고 생각을 했죠. 그래서 그 노래를 [빛나던 날]의 감독 류웨이빈(劉維斌)한테 들려줬어요. 류 감독은 그 때 젊은 사람들이 만든 밴드에서의 로맨스를 주제로 영화를 찍으려고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노래가 많이 필요했죠. 그래서 다유한테 영화 삽입곡을 맡긴 거예요."
[빛나던 날(閃亮的日子)]
작사 및 작곡: 뤄다유
노래: 류원정
1977년
70년대 말, 류원정의 수려한 외모와 서구식의 시원시원한 무대 매너를 통해 대만의 남자 가수는 어떠해야 한다는 새로운 정의가 내려졌다.
[다같이 위를 향해(人人至上)]
도덕재무장 중국청년합창단
1974년
대만 대중가요가 갈수록 다원적인 모습을 갖추어 가던 이 때, 당시 신문국에서는 오히려 정화가요 정책을 내놓아 TV 프로그램에서 필수적으로 일정 비율 이상의 정화가요를 부르도록 규정했다.
[개선가(凱旋歌)]
작사: 판옌챠오(范煙橋)
작곡: 리진광(黎錦光)
[구이린청청/하이샨 레코드 창립자]
"그 때는 이런 대중가요는 퇴폐 음악(靡靡之音)이라고 해서, 회사에서 음반을 내면 가사가 좀 퇴폐적이고 그런 것을 정부는, 신문국에서는 이런 퇴폐성을 좀 제거하고 정화가요를 부르라고 한 거죠. 정부에서 정한 10-20곡의 정화가요가 있었고, 음반사에서 음반도 내야 했어요. 몇 곡을, 열 곡을 내거나 아니면 뭐 앨범을 내거나 그런 식으로. [별들의 모임(群星會)] 프로나 TV 방송에서도 꼭 불러야 했어요. 프로그램 한 편에 정화 가요 몇 곡을 불러야 한다는 식의 규정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가수들도 꼭 불러야 했었죠."
대만 대중가요의 내용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중음악 산업의 모습도 바뀌었다. 1976년 이후 카세트 테이프가 점차 널리 퍼지면서 점차 LP를 대체했다.
[구이린청청]
"민국 65년(*1976년)부터 해서 카세트 테이프가 생겼죠. 카세트 테이프가 20% 정도를 차지했는데요, LP는 80% 정도였고요. 5년 정도 지난 후에는 정 반대가 됐어요. 카세트 테이프가 70%, LP가 30% 정도로요. 점점 더 적어졌죠. 다들 카세트 테이프를 듣게 됐어요."
[만약(如果)]
작사: 스비우(施碧梧)
작곡: 타이자오메이(邰肇玫)
노래: 스비우, 타이자오메이
1977년
1977년, 싱코 레코드에서 금운장(金韻獎) 시상식을 개최해 대학생들의 가요 창작을 독려했고, 이는 곧바로 학생들의 열띤 대화 주제가 되었다.
[타오샤오칭/캠퍼스 민가 운동의 기수]
"금운장은 야오허우셩(姚厚笙)이 당시 리펑 녹음실(麗風錄音室)에서 양셴의 음악을 듣고-양셴이 그 때 리펑에서 녹음을 했거든요- 양셴의 이런 창작 방식을 마음에 들어한 거예요. 그리곤 '이런 음악도 시장이 있겠다'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런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운장을 만들게 된 거예요."
제3부 (4)
[린쉬페이(林絮霏)/당시 싱코 레코드 기획 담당]
"사실은 그 때 이미 그런 분위기가 싹트고 있었어요. 싱코 레코드에서는 다만 그걸 상업적인 메커니즘과 패턴으로 만들고 돈을 더 많이 투자한 거고, 그렇게 해서 전부... 큰 흐름이 일어나게 된 거죠. 1년이 지난 뒤에는 하이샨(海山)의 민요풍(民謠風)도 이 흐름에 동승했던 것 같아요."
캠퍼스 민가(校園民歌)는 금운장을 통해 처음으로 주류 대중음악 시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1974년 이후 이미 많은 대학생들이 기타를 들고 민가 창작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스스로 작곡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금운장의 첫 공개 경연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의 열렬한 참여를 이끌어 냈고, 그들이 부른 노래는 낭만적이고도 산뜻한 분위기를 띄었다.
[천밍샤오/민가 가수]
"그 때 어느 날 학교 캠퍼스 안에 포스터가 많이 붙어 있더라고요. 바로 금운장 제 1회, '전국 대학생 및 전문대생 청년 가창 대회' 이렇게 되어 있었죠. 그러니까 사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하나는 가창 대회였고, 다른 하나는 청년층의 가요 창작을 독려하는 부분이었어요. 그래서 창작 부문도 따로 있었고요. 나중에 시합에서 선발된 이 가수들의 곡을 보면 대부분 창작 부문에서 선발된 노래였어요."
[황윈링(黃韻玲)/가수]
"합창단에 있는 친구 몇 명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들은 '그거 못 봤어? 고등학생은 돼야 된대' 하는 거예요. 저는 '무슨 상관이야' 식이었죠. '가서 물어볼게, (참가하는 데 나이가) 상관있는지.' 친구는 '뭘 물어? 아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래서 저는 또 '응 모르긴 하는데' 이랬고요."
그런데 거기 보면 금운장이라고 써 있잖아요, 싱코 레코드에서 하는 금운장이라고요. 지금의 린션베이루(임삼북로/林森北路)에서 조금만 더 가면 있었는데요, 그래서 제가 친구들한테 '그럼 거기 가서 물어봐야겠다' 이랬어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고 싱코 레코드에 혼자 갔어요."
[우추추(吳楚楚)/UFO 레코드(飛碟唱片) 창립자]
"이 민가라는 게 있었으니까 우리도 공연을 할 기회가 생겼고 음반을 녹음할 기회도 생긴 거죠. 그 일로부터 쭉 이어진 거예요. 제 생각엔 그 때는 대만의 상황도, 국민소득이나 주변 환경이나, 그리고 계엄 해제, 관광 개방 이런 사건도 있었고, 그래서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때마침 좋은 시기를 만나서 이런저런 일을 한 거죠. 당시의 소위 민가 가수들이나 작사가, 작곡가들이 이 대중가요계에 진입하게 됐고요."
[리젠푸/민가 가수]
"당시에 민가 가수들이 다들 인기가 많았죠. 그래서 저희가 무대에 들어가고 나오고 할 때는 바깥에 보이스카웃 단원들이 있어서 단원들이 길이 막히지 않도록 막고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저희는 막 뛰어가고요. 외국 콘서트를 보면 막 연예인들이 뛰어서 공연장으로 들어가고 그러잖아요. 안 뛰어가면 사람들한테 막혀서 못 들어가니까."
[타오샤오칭]
"그 때 이 민가라는 게 있었던 건 사회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한 상관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때 운문무집(雲門舞集)이 생겼고, 란링극방(蘭陵劇坊)이 생겼고, 젊은이들의 소설, 산문, 시 부문에서의 창작 활동이 활발했거든요. 그 때 그 사람들은 다들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들어온 사람들인데요, 외국에서 문화 관련된 걸 공부하고 나서 국외에 발을 붙인다는 건 별로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과학을 하면 그곳 현지에서 경쟁을 하고 동시대의 1류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그래야 하지만 문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귀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마스팡(馬世芳)/음악평론가]
"1977년에 금운장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1979년까지의 이 시기가 대만의 음반산업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전 몇 년 동안 축적된 캠퍼스 가요 또는 중국 현대 민가라는 이 흐름이 이 시기에 이르러서 정말로 음반 시장에 뿌리를 내리게 된 거죠. 그리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요. 이 시기에 이르면 이미 양셴 노래나 중국 현대 민가를 듣는 소수의 문학청년이 있는 그런 맥락에서 이 사람들만 즐겨 듣고, 이 사람들만 공통으로 향유하면서 좋아하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고, 이게 국민 전체의 기타 운동이 됐어요."
사실 민가 운동이 붐을 일으키던 이 시기에 민가라는 이 이름이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해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 (*미국 '포크'가 미국 민요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데 비해 대만의 '민가'가 과연 민가(민요)라는 이름을 계승할 수 있는지의 문제)
[장아이자/가수 및 감독]
"민가(民歌)라고 하면 캠퍼스 민가를 말하는 거겠죠. 좀 차이가 있는데요, Folk song, 외국의 folk song이라고 하면 Bob Dylan이든 Joan Baez든, 그 Joni Mitchell이든, 이 사람들의 folk song이라고 하면 '캠퍼스 민가'가 아니거든요. 캠퍼스 민가와 folk song은 아무래도 좀 다르죠. 진짜 folk song은, 예를 들어 Bob Dylan 같으면 노래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사회와 관련이 있었어요. 노래에서 좀 더 복잡한 이야기를 했죠. 그에 비해 우리 캠퍼스 민가는 굉장히 정말 단순하고 순결, 순진한,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성장하는 걸 담은 노래였어요. 그러니까 비교적 가벼웠다고 할 수 있죠."
[올리브 나무(橄欖樹)]
작사: 산마오(三毛)
작곡: 리타이샹(李泰祥)
노래: 치위(齊豫)
1979년
[정이(鄭怡)/가수]
"제가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사실 치위의 영향을 받아서인데요. 그래서 대회에 참가하게 된 거죠(웃음). 일종의 유인이 된 건데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반주도 같이 하고, 긴 머리를 반쯤 늘어뜨리고, 막 산 속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정말 매력적이었거든요(웃음). 그래서 그 땐 어땠냐 하면 일반 가수들도 앨범을 낼 때 민가라고 하면서 내면 앨범이 정말 잘 팔렸어요.
[가늘게 흐르는 물이 오래 흐르지(細水長流)]
작사 및 작곡: 량원푸(梁文福)
노래: 량원푸
1987년
이러한 민가 붐은 몇 년 후 LP, 카세트테이프 등의 매체를 통해 빠른 속도로 다른 중화권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싱가폴, 말레이시아, 홍콩이 이에 영향을 받았고, 중국 대륙의 학생들이 이를 동경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일정량의 노래가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해외의 다국적인 환경 속에서 중국어 문화와 생활이 이어질 수 있었다.
[월금(月琴)]
작사: 라이시안(賴西安)
작곡: 쑤라이(蘇來)
노래: 정이
1981년
1981년, 쑤라이가 작곡하고 정이가 부른 [월금]이 큰 인기를 얻었다. [월금]은 천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었다. 이는 캠퍼스 민가가 대만 본토 민요의 앞선 세대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으로서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70년대 이래 계속해서 스스로의 노래를 찾아 나간 대만이 마침내 대중의 인정을 얻어 내었음을 상징하는 곡이었다.
1978년, 그간 대만과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던 미국이 중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만과 단교할 것을 선언했다. 공황과 슬픔, 분노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 속, 싱코 레코드에서는 [용의 후예(龍的傳人)] 앨범을 출시했고 앨범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캠퍼스 민가가 걸은 또 하나의 노선인 민족정서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용의 후예]
작사 및 작곡: 허우더젠(侯德健)
노래: 리젠푸(李建復)
1980년
[리젠푸]
"음반이 아직 발매되지 않았을 때, 출시되기 이전에 이 단락을 미리 녹음해 뒀어요. 저는 당장/탕좡(唐裝)을 입고, 그래서 무대에 나가니까 바로 저한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셈이었죠. 2절 부를 때는 뒤에 60명-100명 정도 되는 어린이 합창단이 두 줄로 서 있었고 같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전해진다'는 테마가 있는 노래잖아요. [용의 후예]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때 노래를 듣고, 당시 분위기도 있고 하니까, 되게 감동이 전해지는 분위기였어요. 사람들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 묻어 둔 민족 정서를 노래가 건드릴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 곡이 아마 순위표에서, 두 세 번을 틀어주고 그랬었는데요, [예능 100(綜藝一百)] 순위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1위를 차지했었어요. 물론 음반의 판매량에도 영향이 컸고요. 좋은 쪽의 영향이요.
이런 프로그램은 이 곡뿐 아니라 전체 캠퍼스 민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 사회자나 PD 같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국어(중국어) 대중가요의 큰 전환점을 본 거죠. 그들은 미래에 그 영향이 그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새로운 장르의 형성을 본 겁니다."
[리쇼추안(李壽全)/가수 및 프로듀서]
"때가 딱 맞아떨어졌어요. 제가 제대를 하고 음반사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맞닥뜨린 일, 처음 맡게 된 케이스가 리젠푸 [용의 후예]였죠. 제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시작해서 록 음악 레스토랑에서 DJ를 하고 음반을 틀었던 그 긴 시간 동안 들어왔던 음반, 음반 수천 장을 통해 쌓은 그 경험을 이 음반으로부터 시작해서... 제가 전달하고 싶은, 표현하고 싶은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찾아다녔어요.
편곡은 천즈위안(陳志遠) 씨와 협의를 했고요. 그때 천즈위안 씨는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 프로듀서가 와서 편곡에 대해 묻지 하고요. 제 이전에는 편곡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아마 없었을 거예요. 편곡자한테 알아서 맡긴 건데요. 저는 기타가 있었으면 좋겠다, 첼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여러 곡에다가 제가 표현하고 싶은 걸 넣었죠. 이런 건 제가 그 전에 서양 음반을 들으면서 경험을 쌓은 데서 온 거고요. 많은 외국 창작자들이 만든 앨범에서, 그 사람들이 보여준 것들의 정수를, 제가 일종의 흡수를 한 다음에 되새김질을 해서 제가 만든 국어 음반에 넣은 거죠."
[가랑비가 한창 내리네(小雨來得正是時候)]
작사 및 작곡: 샤오충(小蟲)
노래: 정이
1983년
1983년 9월, 정이는 [가랑비가 한창 내리네]를 발매했다. 이는 리쭝성(李宗盛)이 프로듀싱한 첫 앨범이기도 했다.
[리쭝성/프로듀서]
"사실 그 전에 저는 타오샤오칭 누님과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 때 관현악단을 조직하기도 했고요, 민풍악부(民風樂府)의 공연에서 음악 관련 일을 맡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저는 사실 이 업계에 처음부터 몸을 담그려고 아예 마음을 먹었었죠. 사실 [가랑비가 한창 내리네]를 할 때는 제가 저도 모르게 이미 프로듀서로서 경험을 많이 쌓은 상황이었어요.
예를 들어 [가랑비가 한창 내리네] 간주를 들으면 실내악 현악 4중주가 있는데요, 그 땐 이런 식으로 간주를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플룻 관악도 넣었는데 그런 건 더 없었고요. 많이 팔았죠 그 때."
[가랑비가 한창 내리네]는 거리마다 울려퍼졌고, 민가의 분위기를 간직한 동시에 음악 프로듀싱의 개념을 참신하게 드러낸 이 노래는 일종의 예고장 역할을 했다. 이후 80년대의 대만에 더 새롭고 다양한 '자기 노래'가 나올 것이라는 예고장이었다.
제3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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