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7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 또다시 넵스키 대로를 걸은 날이었다. 피로가 쌓여서 그런지 여행 초중반부에 비해 열심히 다니지는 않았고 그리고 뻘짓도 많이 했다.


침대열차에선 잘 잤고 내리니 아침 7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역이다.




우선 역사 지하에 있는 락커에 짐을 맡겨 둔다. 340루블이었음.




오전 7시의 넵스키 대로는 한산하다. 이곳의 관광지로서의 하루는 오전 9-10시는 되어야 시작한다.

너무 일찍 오니 오히려 할 게 없어서 넵스키 대로의 스타벅스에 와서 아침을 먹는다. 배터리도 충전하고. 그리고 여기서 좀 졸았다.



이 날은 정해 둔 스케줄이 따로 없어서 무작정 어디 갈 곳을 찾아보며 걸었다. 걷다 보니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보인다. 마침 잘됐다. 여길 안 가봤으니 오늘처럼 자유일정인 날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색채가 아름다운 에르미타주 박물관 입구. 이곳도 물론 역대 황제들의 궁전이었고 궁전은 흔히 겨울궁전이라 불린다. 황제들이 아마 여기서 겨울을 보냈나보다. 원래부터 이 푸른빛의 건물은 아니었고, 황제에 따라서는 다른 색으로 궁전을 칠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행다니며 본 정교회 성당과 마찬가지로 색감이 정말 특이하면서 아름답다. 건물에 이런 색을 쓸 생각을 하다니.


그나저나 10시 개장이었는데 9시 반부터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이렇게 기다리다가 10시가 되면 다들 쭉 들어가는 건가 하면서 줄을 서 봤다.




그리고 이 날 정말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ㅋㅋㅋ 바로 이 줄에서 입장을 2시간 반 넘게 혼자 서서 기다린 것이었다. 

왜 이렇게 줄이 긴지 몰랐는데, 줄을 선 지 1시간이 다 되고 나서야 안내방송을 듣고 알았다. 매월 첫째 주 목요일은 입장이 무료라는 것을. 어쩐지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 해도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리는 없는데, 무료 입장이라고 하니 정말 러시아인이건 외국인이건 다들 기다리는 것이다. 박물관 개장은 10시였지만 사람들이 들어가기까지는 소지품 검사, 입장권 구매 등 많은 행동을 해야 하니 시간이 걸리고, 들어간다고 다들 한번에 건물을 꽉 채우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이니 들어가는 속도가 엄청 느렸다. 9시 반이 조금 넘어 줄을 섰는데 12시 반 가까이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줄 앞뒤 사람들이나 감상하면서 기다렸다. 

지루함을 달래고 싶었지만 핸드폰 배터리가 부족했고, 3G가 터지지 않았고, 날씨까지 추웠던 것이다. 사진에서 보듯 비가 조금씩 오면서 날씨가 굉장히 쌀쌀해졌다. 아마 이 날 오전 기온이 10도를 조금 넘었는데 여행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다. 가져간 외투로는 너무 추워서 손이 곱았고, 그 바람에 핸드폰이고 뭐고 제대로 만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입장을 멍하니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걸 2시간 반 넘게 했다. 정말 지루한 시간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서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서 있다 보니 체력의 한계가 왔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고, 그렇게 고생해서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보아야만 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무료 입장이 아니었다면 들어가서 미술관을 보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말이다. 그래서 ㅋㅋㅋ 결국 줄에서 그냥 빠져나왔다. 마지막 사진에서 보듯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입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물 입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체력 저하와 날씨 등으로 그렇게 더 오래 서 있을 순 없었고 그렇게 들어가서 관람을 제대로 할지도 의문이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입장료가 600루블이다. 대단한 양의 대단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치고 비싸지 않은 관람료라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밥을 한 끼 먹어도 400루블인데 600루블이라고 크게 비싼 돈이 아니다. 그러니까 무료 입장일에 줄을 이렇게 끝도 없이 서 있기보단 그냥 얼마간의 입장료를 내고 좀 편하게 들어가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하필 아무것도 모르고 간 날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무료입장일이라서 이렇게 오전 전체를 황당하게 날렸다. 내가 생각해도 도대체 뭘 했나 싶다. ㅋㅋㅋ 그래도 좀 위안이 된 것은 궁전/박물관의 외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근처에 서 있기만 해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같이 줄 설 동행이 있는 게 좋은데 말이다.




비와 추위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넵스키 대로의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에 들어갔다. 저 왼쪽은 '비트샐러드와 청어요리' 오른쪽은 스메따냐와 치즈빵이다. 비트샐러드는 내가 좋아하는 그 비트샐러드이고 청어요리는 비린내가 나는 생선요리인데 맛있었다. 개인적으로 비린내 나는 생선을 좋아함. 이렇게 시켜서 따뜻한 홍차와 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오전 시간을 날리고 돔 끄니기로 간다. 빅토르 최 관련 서적도 한번 더 보고 싶고,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념품도 사고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관광객이 몰리는 넵스키 대로다 보니 돔 끄니기에서도 그냥 책만 파는 게 아니라 관광객용 기념품을 많이 판다. 엽서나 차나 작은 과자 같은 것 등등. 맨 뒤에 있는 것은 러시아어 기초 학습서이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지루함을 달래며 읽으려고 하나 샀다.

사실 이 서점에서 러시아의 사회과학 책(정치나 사회 관련)을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코너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소설 코너는 엄청나게 많은데. 내가 못 찾은 거겠지? 아쉬웠다.


아래는 빅토르 최와 러시아 록 관련 현지 서적인데, 연구서도 있고 인터뷰 모음도 있고 심지어 빅토르 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대본(팬픽!!!)도 있었다. 이걸 다 사와도 러시아어를 읽지도 못하고 해서 제목만 사진찍어 왔다. 나중에 정말 이런 책이 내 연구에 필요한 때가 온다면 그 때는 또 구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나 이게 도움이 될 사람이 있을까 해서 찍은 사진을 올려본다. 중간의 연표는 빅토르 최의 음반 발매 목록이다.

교보문고에 비하면 돔 끄니기가 엄청난 규모의 서점도 아니고 대중음악 코너도 적었는데, 이렇게 이 주제 관련 서적이 많다니 너무 좋았다. 역시 온 보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음악 코너의 서적은 해외의 것(영미 대중음악)이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이 이 시기의 러시아 록과 특히 빅토르 최 관련 서적이었다.



여기서 책을 살 때 여행 초반부에 산 상트페테르부르크 카드로 할인을 받으려 했는데, 카드를 짐 맡기면서 짐 속에 두고 온 것이었다. 그걸 모스크바 역까지 다시 가서 찾고 짐을 다시 맡기고 하느라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그렇게 다리 품과 시간을 팔아서 할인받은 금액은 고작 350루블이었다(20% 할인). 왕복 시간도 30분 넘게 걸렸고, 게다가 역에 가서 카드를 찾은 후 짐을 한번 더 맡기느라 500루블 넘는 돈을 더 내야 했던 것이다. 이 날의 두 번째 뻘짓이었다. 그냥 바로 계산할걸. 이 날의 두 번째 뻘짓이었다. 

뭔가 여행 후반부에는 3G도 안 터지고 체력도 방전되고 씻지 못해서 그랬는지, 이렇게 여행 진도가 좀 느렸다.




노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버거킹에 또 왔다. 클럽 캄차카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 볼까 했지만 아마도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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