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초이 & 러시아

고골센터 한국 초연 [카프카] @ 아르코예술극장, SPAF

Kodon 2019. 10. 9. 23:44

 

지난 금요일 밤의 공연 기억을 이제야 되새겨 쓴다.

 

고골센터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항상 애독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의 한국 초연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극단 고골센터가 한국에는 익숙한 이름이 아니지만, 러시아나 빅토르 초이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지난 해 영화 [레토]의 소식을 희미하게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레토의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주축이 된 러시아 연극 단체가 고골센터이다. 레토에서도 유태오를 포함한 주인공 3인은 물론 캐스팅을 거친 외부 배우였지만, 영화 속 많은 조연들은 고골센터 전속 연극배우들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예매했다. 무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개막작이었기에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다.

 

고골센터와 배우들의 인스타 페이지를 오랫동안 봐 온 사람으로서 예상은 했지만, 화려하고 세련된 무대와 다양한 구성에 감탄했었다. 고골센터는 러시아에서 실험적인 성향의 극단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연극이란 장르에 딱히 해박한 편은 아니라 ‘실험성’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지 짐작가지 않았는데 고골센터의 경우에는 음악과 무용, 화려한 의상과 무대조명을 동반한 형식적 신선함을 추구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인터미션을 제외한 순 공연 시간만 200분이라 사실 좀 걱정했는데(그 실험적이라는 것이 추상성과 난해함 및 지루함을 의미할까봐) 3시간이 넘는 긴 공연시간이었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틈이 없었다. 음악적 완성도와 화려한 무용, 세련된 무대조명에 감탄하느라. 특히 나는 이 극의 음악이 너무 좋았다. 카프카가 가부장적 부친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받으면서도 부친을 사랑하고 닮고 싶어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 극에서는 괴테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여러 번 변주되었다.

 

극의 내용도 난해하지는 않았다. [카프카]는 카프카의 일생을 그린 연극이었다. 카프카라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 상황을 뽑아 그것을 연기, 음악과 무용, 카프카의 실제 일기와 작품 속 구절이 얽혀가는 가운데 극적으로 구성했다.

 

그런데 [레토]를 통해 고골센터를 알게 된 사람으로서 내게는 [카프카]가 신기할 정도로 [레토]와 겹쳐졌다. 모두 희미하게나마 들어본 어느 유명인물에 대한 회고라는 극의 형식, 해설자의 존재, 주인공들의 매닉한 감정처리, 하다못해 무대 뒷배경 영상의 흰 스크래치 처리 등등. 어떤 면에서는 다른 소재를 비슷한 방식으로 담아낸 두 작품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레토]를 보면 초이의 팬들이 아니면 파악할 수 없지만 사실 초이에 대해 이렇게까지 조사를 하고 영화를 만들었나 싶었을 정도로 굉장히 세밀한 디테일이 여럿 있는데, [카프카]에도 실제 소설가에 대해 자세히 알았다면 분명 더 감탄하고 공감했을 만한 디테일이 여럿 있다고 느꼈다. 다만 나는 이 소설가에 대해서는 독일의 유대계 작가, 우울해 보이는 그의 사진, 그 유명한 [변신], 해변의 카프카(농담) 정도의 아주 일반적인 사항밖에 알지 못하기에 그 디테일의 정체를 정확히 간파할 수는 없었다.

 

연극을 보고 [레토]에 대해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어 새삼 기뻤다. 영화의 빠른 템포, 인물들의 매닉한 감정, 해설자의 존재 등이 이제는 한 영화의 구성요소라기보단 고골센터라는 ‘연극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의 일부분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레토]와 [카프카]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느끼기로는 소재가 되는 인물에 대한 태도의 차이었다. [레토]는 꽤나 따뜻한 영화다. 빅토르 초이와 마이크, 나타샤 나우멘코의 삼각관계를 시종 애정과 향수가 어린 시선으로 재현한다. 초이가 냉정한 심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초이의 자기 삶과 커리어에 대한 욕심에 많은 애정과 기대를 담아 보여준다. 나우멘코 부부의 ‘선의’를 그리는 부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에 비해 [카프카]는 프란츠 카프카의 인간적인 강함과 약함, 문학가로서 추잡하고 보잘것없는 현실을 초월하려는 그의 욕구와 그 하찮은 현실의 일부분이 되어 버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문학가로서 그가 남긴 말의 슬픔과 아름다움, 생활인으로서의 그가 표출했던 ‘벌레’로서의 무력함과 나약함이 대비되어 펼쳐지며 카프카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그런 측면에서 아쉬웠던 것은 카프카의 약혼자에 대한 극의 묘사, 또는 그 약혼자에 대한 카프카의 묘사 자체였다. 생활력이 약하고 감성적으로 예민한 남성 문학인으로서의 카프카는 외향적이고 활발하며 문학적으로 무딘 약혼자에 대해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던 듯 하고, 그것이 (극중에서 직접 언급한 카프카의 일기에 따르면) 여성에겐 영혼이 없다는 식의 여성비하적인 경멸로 나타났다. 카프카가 20세기 초의 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여성비하가 실망스럽긴 해도 아주 의외는 아니었다.

극에서도 카프카의 경멸적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과정에서 이것이 그 여성비하를 비판하는 게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약혼자가 너무 바보같이 묘사되어서 보기가 불편했다. 내가 이런 부분에 예민하기도 하지만, 인터미션 중에 바로 옆 사람들도 “카프카의 여성관이 아주 왜곡되었던 것 같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극의 모든 것이 최첨단이고 세련되었는데 약혼자의 묘사는 아주 20세기적으로 왜곡되어 있어서... 극단 본인들의 이 장면 재현에 대한 코멘트가 궁금하긴 하다(러시아어 웹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이러한 극 내용상의 아쉬움과 별개로 외부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자막이 너무 안 맞았다. 아무리 연극이 영화 등의 녹화매체에 비해서 시간적으로 가변성이 있다 해도 사실 이런 정교한 연극에서는 초 단위의 차이도 잘 안 날텐데 자막 싱크가 어떻게 그렇게 아마추어적으로 안 맞는지 좀 답답했을 정도였다.

 

이 극은 카프카의 이른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카프카는 병약한 신체, 외면받는 무명 소설가라는 현실과 죽음을 앞둔 유대인으로서의 랍비들과의 대화라는 스스로의 환상 속에서 죽어간다. 그리고 극의 해설자는 그를 사랑하고 또 괴롭혔던 여동생들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나하나 사망했음을 언급하고 막이 내린다. 그러고 보니 극단 대표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역시 유대인이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서, 또 반정부 인사로서 세레브렌니코프가 얼마나 반유대적 공격을 많이 받았는지 순간 상기하게 되었다. (과거 [레토] 관련 논란이 있었을 때 러시아어 웹을 검색하다가 한국인인 나로서는 너무나 낯설고도 어디서 보긴 한 듯한 인종적 혐오표현을 많이 봤었기 때문이다) 이 [카프카]에 그의 입김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감독으로서 만든 영화 [스튜던트]에도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