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피토-쇼(Шапито-шоу) (2011)
샤피토-쇼(Шапито-шоу) (2011)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얼마 전 한국외대의 관련 분야 연구소와 함께 소규모의 흑해영화제를 상영했는데, 거기서 본 작품이다. 상영시간에서부터 눈에 띄는데 내용이나 구성, 음악 등 모든 것이 특별했다.
러시아 출신인 세르게이 로반(Sergej Loban) 감독의 영화 <샤피토-쇼(Chapiteau-show)>는 작년 제33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으며, 영화제 기간 내내 최대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4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긴 상영 시간과, '사랑', '우정', '협력', '존경'의 4개의 이야기가 맞물리는 독특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제작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추가된 부분으로 인해 발생한 의도하지 않은 미적 효과가 어우러져 하나의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작품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작년 현지에서 이 영화를 보았던 필자 역시 이전의 러시아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 작품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러시아의 유명한 휴양지인 크림 지역 해변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엑스트라로 등장하고, '샤피토-쇼'라는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공연장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는 에피소드와 인물들로 인해 각 에피소드 순서는 의미가 없게 된다. 영화는 가상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남녀의 사랑, 유명 배우이자 연출가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아들의 관계, 청각 장애인들 간의 우정과 갈등, 엘비스 프레슬리와 빅토르 최로 대표되는 서방과 러시아의 대중문화, 그리고 극 중에서 영화를 만드는 젊은이를 통해서 묘사되는 영화 제작의 어려움과 신비 등 다양한 주제를 놀라울 정도로 짜임새 있게 엮어내고 있다.
그런데 영화 <샤피토-쇼>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 외에 자유로운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휘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인 세르게이 로반이 조직한 일종의 지하 문화운동 단체인 공동창작집단의 결과물이다. 'SVOI 2000'이라는 명칭의 이 공동창작집단은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탈퇴할 수도 있다. 지금은 러시아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새로운 인물로 떠오른 이 영화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이러한 비공식적인 문화예술단체에서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배경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러시아라는 사회가 아직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창의력을 갖춘 젊은 인재들이 사회적 명성이나 외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당장에 경제적인 도움이 되지도 않는 창작 집단을 만들어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글의 저자가 이번 흑해영화제에 와서 작품 해설 및 통역을 맡았다.)
휴양지로서의 크림 반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감각,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련 시절의 일상에 대한 향수 등을 볼 수 있는 작품이며, 러시아라는 배경을 떠나서도 '인간관계의 바보같음'을 웃으며 볼 수 있는 귀여운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11년작인데, 크림 반도가 분쟁지역이 된 지금은 여기서 이런 일상적인 영화를 찍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찍을 땐 크림반도에 그런 의미가 부여될 지 이 사람들도 몰랐겠지.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소련인들의 단골 여름휴양지였다고 한다.
빅토르 초이의 팬으로서는 '초이 짝퉁 가수'라는 배역이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짝퉁 초이'가 나와서 어리버리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팬으로서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배역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초이는 죽었고, 소련은 끝났고, 그런 2010년대의 러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에서 짝퉁 초이가 부르는 곡은 실제 초이의 곡이 아니라 초이의 커버 밴드인 <빅토르(Группа Виктор)>가 만든 '초이 스타일의 신곡'이다. 빅토르라는 밴드는 이름 그대로 빅토르 초이의 커버 밴드인데 키르키즈스탄 출신 사람들이 하고 있으며, 정말 20년간 꾸준히 초이 노래를 불러 오고 초이 스타일의 신곡을 쓰는, 신기한 밴드이기도 하다. 실존하는 짝퉁 초이를 부르는 짝퉁 초이 배역이라니 참 아이러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