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권 음악

대만의 대중음악사: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제2부 1955~1970년

Kodon 2016. 9. 7. 23:42

* 대만의 TV채널 公視에서 2011년 방영한 대만 대중음악사 다큐멘터리 [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聽時代在唱歌)] 번역입니다. 개인 공부 목적으로 올립니다. 본 포스트는 그 중 제2부인 1955-70년의 대만 대중음악사를 다룹니다.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제2부 네모 상자 속에서 흐르는 노래 (1955~70)

공식 홈페이지: http://www.pts.org.tw/ptsing/page_1955_1970.htm


音樂產業大事記 음악 산업 연대기
1957年

뮤지컬 사극 《초선(貂蟬)》으로 홍콩과 대만에서 십여년 간의 황매조 영화 유행이 시작되어 1968년까지 계속되다. 리거 레코드(麗歌唱片), 푸마오 레코드(福茂唱片)사가 창립되다.

1958年

타이페이의 비위티엔(碧雲天)」 노래 무대(歌廳)가 개장했으며, 이는 이 시기에 가장 유명했던 노래 무대 중 하나였다.

1960年

대만어 영화가 널리 유행했으며 이에 따라 대만어 가요 역시 크게 발전하다.

1961

즈웨이(紫薇)가 「푸른 섬의 세레나데(綠島小夜曲)」로 전 대만을 풍미하고 당시의 신기록을 세우다. 하이샨 레코드(海山唱片)사가 창립되다. 푸마오 레코드사개 데카(Decca) 레코드사의 판권을 획득했고 대만에서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하다.
예쥔린(葉俊麟)이 야저우 레코드사(亞洲唱片公司)의 문예부장을 담당하여 대량의 일본 가요에 대만어 가사를 넣기 시작하다.

1962

대만의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처음으로 초과하다. 대만방송사(台視) 개국하다. TV 프로그램 「군성회/별들의 모임(群星會)」이 첫 방송을 타 대만의 첫 번째 TV 가요 프로그램이 되다. 칭샨(青山), 완취(婉曲)、시에레이(謝雷)、장치(張琪)、위티엔(余天)、샤신(夏心)、란샤오링(冉肖玲)、야오수롱(姚蘇蓉)、덩리쥔(鄧麗君) 등의 가요계 스타가 프로그램을 통해 등장하다.

1963

대만 최초의 자체 제작 스테레오 앨범 〈효부의 눈물(孝婦淚)〉이 제작되다.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가 열렬한 반응을 얻고, 링보(凌波)의 대만 방문 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다.

1965

서양의 팝 음악(熱門音樂)이 대만에 유입되어 청년 세대의 사랑을 받다. 좡누(莊奴)가 TV 연속극 주제곡을 쓰기 시작하다.

1966

위광(余光)의 「청춘의 노래(青春之歌)」가 대만 최초의 서양 가요 방송 프로그램이 되다. 대만에 녹음실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예허밍 녹음실(葉和銘錄音室), 바이진 녹음실(白金錄音室) 등이 연이어 세워지다.

1968

대만 사회의 대중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해, 황매조 영화 및 음악 스타일, 총야오/경요(瓊瑤)의 소설, 영화, 방송 드라마, 양리화(楊麗花)의 TV 거자이시(歌仔戲)가 대만 전역에서 인기를 얻다. 바이징뤼(白景瑞) 감독의 영화 『오늘은 집에 안 갈 거야(今天不回家)』가,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줘홍위안(左宏元)이 작곡하고 가수 야오수롱(姚蘇蓉)이 부른 영화 주제곡과 함께 동남아 전역을 휩쓸다. 대만이 순간 중화권 대중가요의 중심에 서게 되다.

1969

중국전신공사(中視)가 개국하다. 대만에서 컬러 TV 수상기가 생산되기 시작하다.


프로그램 소개글

1960 무렵 대만에는 개가 넘는 영화관이 존재했다. 한 해에 오백 편 가까운 영화가 상영되었고 정부가 통제하는 영화 제작소도 3곳 있었다. 1950년 농쟈오(農教) 영화 제작소는 대만에 온 이후 첫 영화 「악몽에서 처음 깨어나다(惡夢初醒)」를 만들었고, 1950-54년 간 타이페이 국내 영화 영화관에서 방영된 영화는 662편에 이른다. 그 중, 대부분의 영화는 홍콩에서 왔고, 일부는 상하이 영화를 다시 방영하는 식이었다. 영화의 인기와 음반의 인기가 양 측의 오락산업에 산업의 동력을 이끌어 냈고, 각 라디오 방송국은 가창대회를 통해 방송사를 선전하는 한편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앨범을 내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국은 신인 가수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 무대가 되었다.

리거(麗歌), 하이샨(海山), 싱푸(幸福) 등의 음반사가 설립되었고 중국어 가요계에 처음으로 다수의 남자 가수가 등장했다. 시에레이(謝雷), 니빈(倪賓), 샤신(夏心) 등이다. 1963년 네덜란드의 필립스 사가 카세트 레코더를 발명했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음반업계의 노조가 조직되었고 기술 매체와 공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음반 업계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리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1961년 음반업계는 투명 플라스틱과 컬러 인쇄기술을 통해 음반사(史) 상의 첫 픽쳐디스크를 제작한다. 음반(*)의 발매가 새로운 유행이 되었고, 하이샨과 푸마오 레코드가 설립되었다. 또한 푸마오는 영국 데카 레코드를 대리하여 대만 유일의 대리판매업자가 되었다. (*본문에는 '錄音帶'의 발매가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당시에 錄音帶 즉 '카세트 테이프'는 발명되지 않았음. 錄音帶의 또다른 의미 혹은 정확한 상황을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방면에서는, 황매조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가 대만을 휩쓸던 때 황매조 음반 역시 이에 따라 시장에서 주목받았다. TV의 발전은 과학기술과 방송 매체의 혁명이었으며, TV를 통해 방송의 효과와 영향이 커지고, 정보와 유행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이는 대중에게 있어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대만방송(台視)는 1962년에 개국했고, TV 프로그램 「별들의 모임」은 대만 가요가 처음으로 공공 매체를 통해 미디어에 노출된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의 경제 소비 생활과 기술 수준이 상승했고, 대만은 이 시기 경공업을 국가 발전 수단으로 삼게 된다. TV가 가정에 들어가면서 방송 기술은 대중 엔터테인먼트 생활을 크게 바꿔놓게 된다.

대만 음반은 동남아에서 크게 팔렸고, 이후 2세대 스타인 야오수롱, 칭샨, 바이쟈리(白嘉莉) 등이 동남아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66년 대만에 예허밍 녹음실과 바이진 녹음실 두 곳의 전문 녹음실이 설립되어 업계의 생산이 촉진된다. 서양 음악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의 환영을 받았고, 당시의 폐쇄적인 사회가 미국 자유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갑자기 꿈을 향한 문을 열어젖히게 되었다. 위광이 방송한 「청춘의 노래」는 대만 최초로 서양 가요를 소개한 라디오 방송이다. 이에 따라 음반업계에 해적판 음반 유행이 한 바탕 몰아치기도 했는데, 서양 음반의 수입에 한계가 있고 오리지널 앨범의 값이 싸지 않은 상황에서 젊은 학생들은 오리지널 앨범을 살 수 없었고, 따라서 해적판 음반이 시장의 주류가 되었다. 「학생의 음악(學生之音)」이 어느 순간 유행이 되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레코드 가게를 겸업으로 열기 시작했다. 이는 서양 음악 감상의 조류를 만들어 냈고, 학교 동아리에서는 무도회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무도회는 남녀 간의 교제를 목적으로 했으며 전통, 보수적인 관념을 깨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이후 무도회는 경찰에 의해 금지되고 난 후 무도회를 반기는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해 장소를 빌리고 전속 DJ가 노래를 트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드는 비용이 점점 높아지고 표를 판매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음반 산업 역시 계획 경영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곡思慕的人、月亮代表我的心、綠島小夜曲、負心的人、溫泉鄉的吉他、淚的小花、今天不回家、晶晶、月滿西樓、台灣好、高山青、何日君再來、黃昏的故鄉、舊情綿綿、今天不回家

이 시기의 대표 가수謝雷、倪賓、夏心、姚蘇蓉、青山、楊小萍、紫薇、美黛




방송 내용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제2부 네모 상자 속에서 흐르는 노래 (1955~70)


[푸른 섬의 세레나데 (綠島小夜曲)]

작사: 판잉지에 (潘英傑)
작곡: 저우란핑 (周藍萍)
노래: 지루샤 (紀露霞)


당시 대만 가요계의 황후였던 지루샤(紀露霞)가 [푸른 섬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걸 들으니 마치 단번에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16세의 지루샤는 이웃인 얼음 가게 주인의 권유로 방송국의 가창 대회에 응모했다.


[지루샤/가수]

"학생 시절에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항상 밖에 나가서, 사람들이 가게 하는 곳에 가서 여기저기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가게 사장님 친척이 자주 가게에 와서 사장님하고 이야기를 하고 그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길 라디오를 틀면 저우쉬안(周璇) 아니면 바이광(白光) 노래라고 하더군요. 저도 그 가수들을 따라 노래를 불렀죠. 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노래하는 걸 듣곤, 네가 이렇게 노래하는 걸 좋아하니까 아예 방송국에 데려다 주겠다, 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따라가서 민셩(民聲) 방송국에 갔죠. 당시에 쳥두루/성도로(成都路)에 있었어요. 

방송국에서 저한테 어떤 노래를 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마침 [높은 산은 푸르고(高山)]가 막 나오던 시점이어서 그 노래를 불렀어요."


[높은 산은 푸르고]

작사, 작곡: 장저 (張徹)
노래: 지루샤


지루샤가 응모한 것은 당시 대만 가요계의 황제였던 홍이펑(洪一峰)과 그의 형 홍더쳥(洪德成)이 함께 사회를 보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그녀는 이 프로그램의 고정 가수가 된다. 당시 대만 일반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오락 매체는 라디오라는 작은 네모 상자 였다. 방송국에는 고정 가수가 여러 명 있었고 사회자의 프로그램 배치와 청중의 주문에 따라 가수들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루샤]

"완전히 라이브로 했죠. 악단도 모두 라이브로 연주했고요. 바로 방송으로 내보내니까, 농담을 하거나 실수를 해도 바로 방송이 되는 거죠."


[홍이펑/가수, 작사 및 작곡가]

"제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했을 때는 모두 부를 노래를 신청하는 식이었어요. 노래 듣길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죠. 노래를 부르면 정말 좋아하고요. 그래서 제가 지루샤, 린잉메이(林英美), 장슈메이(張淑美) 동생들을 불러서 방송의 고정 가수를 시켰어요. 저는 바이올린을 아니면 아코디언을 켜는 역할이었어요.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들으면 바로 노래 신청을 했고, 신청하는 청중들도 정말 좋아했어요."


[차이궈롱(蔡國榮)/영화 평론가]

"방송은 돈을 안 내도 됐으니까요. 물론 제 기억으론 당시에 라디오에 기본적으로는 세금이 붙긴 했지만-특수한 세금이었죠- 그래도 그건 많지 않았어요.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듣거나 하는 다른 종류의 오락 활동에 비하면-당시엔 물론 노래방도 없었고요- 말하자면 방송을 듣는 게 제일 값이 안 들었죠."


[지루샤]

"가을의 원망(秋怨), 달밤의 슬픔(月夜愁), 봄바람을 바라며(望春風) 같은 추억의 옛날 노래를 부르곤 했죠."


1950년대의 대만 대중가요 중에서는 여전히 대만어 노래가 많았다. 당시가장 인기있었던 가수는 물론 홍이펑과 원샤였다. 홍이펑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고, 대만 북부의 청중들이 그를 특히 좋아했다. 원샤는 목소리가 높고 낭랑했고 남부 청중에게 환영받았다. 


[단수이의 황혼 (淡水暮色)]

작사: 예쥔린 (葉俊麟)
작곡: 홍이펑
노래: 홍이펑


[푸른 섬의 밤 (綠島之夜)]

작사: 원샤
작곡: 토쿠치 마사노부 (渡久地政信)


당시 대만의 가장 큰 음반사는 타이난의 야저우 레코드(亞洲唱片)였다. 원샤는 야저우 레코드의 주요 인물이었고 홍이펑과 지루샤는 원래 북부의 타이셩 레코드(台聲唱片)에서 음반을 냈다. 그들의 노래는 라디오 방송국과 음반이 퍼져나감에 따라 점점 더 널리 알려졌다. 이후 이들 역시 야저우 레코드에 포섭되었다.


[지루샤]

"그 때 야저우 레코드의 사장님은 절 몰랐어요. 저는 북부에서 인기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제가 중광(中廣) 방송국의 [좋은 농촌(好農村)]에서도 녹음을 했기 때문에 남부에서도 절 알았죠. 원래는 원샤가 남부에서 인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야저우 레코드에서 낸 원샤 앨범이 대만 전체를 계속 휩쓰면서 북부에도 원샤의 목소리가 닿게 되었어요. 제 목소리도 남부에 닿았고요. 야저우 레코드가 레코드 품질이 더 좋았어요. 레코드 품질이 안 좋으면 몇 번 틀고 난 다음에는 잡음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야저우 레코드는 레코드를 계속 틀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 노래 중에 유행할 수 있었던 노래는 전부 다, 양심적으로 말하면 전부 야저우 레코드에서 나온 거였어요."


[린시에후이(林謝輝)/당시의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

"그 때 음반사, 야저우 레코드하고 우후 레코드(五虎唱片)에서는 원래 방송국과 밀약이 되어 있었어요. 당시엔 무슨 대가를 내야 하는 건 아니었고, 음반을 내면 방송국에 먼저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방송국에선 노래를 우선적으로 내보내고, 방송국에서요, 그러면 방송국 쪽에선 체면을 차린 게 되는 거였죠."


음반사가 라디오 방송 사회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나중에는 방송국 사회자가 스스로 음반사를 차리는 일도 있었다.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사회자 중 하나였던 아딩(阿丁)은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를 보는 친구들 몇 명과 함께 타이페이에 우후 레코드를 설립했다. 


[덩쥔화(아딩) 鄧君華 (阿丁)/당시의 라디오 프로그램 사회자]

"방송국에서 우리가 프로그램 사회를 보면서 가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해도도 비교적 높았으니까 우리 다섯 명이 같이 레이후 레코드(雷虎唱片)를 설립하게 되었지요. 문예부는 우징종(吳景中)이 맡았고 그가 가수들을 훈련시켰어요. 요우야(尤雅), 쟝레이(江雷), 요우칭(尤)도 우후 레코드, 우리 여기에서 출발했어요. 황시티엔(黃西田), 예치티엔(葉田), 궈따청(郭大誠)도 다들 우리가 띄웠던 가수들이고요."

(*레이후는 우후 레코드의 초기 이름)


우후 레코드에서는 수많은 히트 앨범이 발매되었다. 예를 들면 황시티엔의 [농촌의 형님 (田庄兄哥)], 궈따청의 [바보같은 요리사 (糊塗總鋪師)] 등이었다. 당시 황시티엔은 청춘의, 활기찬 이미지를 내세워 히트곡 [농촌의 형님]을 불렀다. [농촌의 형님]은 원래 일본 가요에서 온 곡이었고, 가사는 당시 가장 저명했던 작사가 예쥔린이 썼다. 가사에는 시골 소년이 일자리를 찾으러 타이페이로 상경하는 심경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의 대만 사회간 도농 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의 대만어 가사에는 고향을 떠나 꿈을 찾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린펑(林峰)의 [낡은 가죽 가방을 멘 유랑아(舊皮箱流浪兒)], 홍이펑의 [타이페이 발 막차(台北發的尾班車)], 원샤의 [급행 열차 아가씨(快車小姐)] 등이었다. 이는 모두 일본 곡을 빌려 대만인들의 생각을 표현한 곡이었다. 이 중에는 천펀란(陳芬蘭)이 부른 [고아 아이의 소원(孤女的願望)]도 있었다.


[고아 아이의 소원]

작사: 예쥔린
작곡: 요네야마 마사오 (米山正夫)
노래: 천펀란


대만어 가요가 음반과 민영 방송사를 거쳐 전 대만에서 불리고 있었을 때, 국어(중국어) 가요는 타이페이의 노래 무대(歌廳), 중광, 정셩 등의 공영 방송국을 주 무대로 하고 있었다. 전쟁 후 대만에 유행한 중국어 가요 중에서는 대부분 여전히 상하이에서 온 옛 가요가 많았는데, 1954년에 이르자 오리지널 중국어 히트 가요가 처음으로 대만에 존재하게 되었다. [푸른 섬의 세레나데]였다. 


[차이궈롱]

"당시 민영 방송국이 꽤 많았는데요, 영향력이 제일 큰 건 그래도 여전히 중광이었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할 때 즈웨이(紫薇)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회상곡(回想曲)], [푸른 밤의 세레나데] 전부 즈웨이가 불러 유명해진 곡이었어요. [푸른 밤의 세레나데]가 유행했을 때 라디오를 켜기만 하면 거의 항상 그 노래가 들렸고, 어디에서나 들렸어요."


[푸른 밤의 세레나데]

작사: 판잉지에
작곡: 저우란핑
노래: 즈웨이


[푸른 밤의 세레나데]는 저우란핑이 작곡하고 판잉지에가 가사를 쓴 곡이었다. 저우란핑과 판잉지에는 중광 음악팀의 동료로서 모두 타이페이 런아이루(인애로/仁愛路)에 있는 중광 독신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판잉지에가 저우란핑에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세레나데 풍으로 가요를 하나 작곡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중국 대륙에서 대만에 온 지 수 년 되었던 그는 그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생각하며 푸른 빛이 가득한 대만의 풍경을 그려 내어 낭만적인 가사를 써 냈다. 이후 여기에 저우란핑이 곡을 붙였다.


[지루샤]

"그 때 제가 마침 중광에 있었는데요, [좋은 농촌] 프로를 녹음하고 있었죠. 뒤에서 연주하는 밴드는 바로 저우란핑이었어요. 저보고 바로 녹음하라고 하는 거예요. 녹음을 하고는 청중들이 어느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지, 어느 곡이 제일 인기있는지 고르게 했어요. 그 결과로 제가 녹음하게 된 게 [푸른 밤의 세레나데]였어요. 그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결과 제가 1등을 했었죠. 처음에는 제가 녹음을 한 거였어요. 나중에 제가 결혼을 하고 나서 즈웨이가 부르게 된 거죠.

그가 우리한테 이야기한 '푸른 섬'이란 바로 우리 대만이죠. 그게 바로 우리 대만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예쁜 섬이라는 거예요."


[푸른 밤의 세레나데]는 중광에서 나온 이후 열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곡은 당시 바로 대만에서 앨범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곡이 흘러흘러 해외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 이르기도 했다. 동남아에서 곡이 큰 인기를 얻은 후, 대만의 밍펑 레코드(鳴鳳唱片)가 1958년에야 또다른 중광 전속 가수인 즈웨이를 데리고 와 취입시켜 이 곡을 음반으로 냈다. 이는 대만 전후 초기에 가장 인기있었던 대만 현지의 중국어 가요가 되었다.


[중간 광고]


[12:30]

[한족 남자에게 시집갈래(願嫁漢家郎)]

작사: 좡누(莊奴)
작곡: 저우란핑
노래: 즈웨이


마찬가지로 저우란핑이 작곡하고 즈웨이가 부른 [한족 남자에게 시집갈래]를 작사한 것은 또 한 명의 중요한 작사가 좡누였다. 이 노래는 좡누가 대륙에서 대만에 건너온 초기에 쓴 것으로서, 이후 그는 빛나는 작사가 커리어를 걷게 된다. 


[좡누/작사가]

"거기에서 기자도 하고 편집 일도 하면서 틈이 나면 시나 가사, 산문 같은 작은 글을 쓰곤 했죠. 신문에 나면 원고비도 좀 얻고 자기 수양도 되고 했어요. 저는 그 때 국가 방송사인 중광에 저우란핑이라는 작곡가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보다 나중에 알게 된 거죠. 그 사람이 제 가사를 보니까 괜찮아서 그걸 가지고 작곡을 한 거고, 원고비도 저는 못 받았고 저는 그 때 완전히 몰랐어요. 나중에 저우란핑과 다른 사람들이 영화를 찍는데 탕샤오화(唐紹華)가 감독이었고 저우란핑이 작곡 담당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저를 찾아서 작사를 맡겼죠. 저우란핑이 저를 추천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아냐고 저우란핑한테 물으니 그 사람이 자기가 그 사람 가사를 종종 쓴다고 했어요.

그렇게 저를 찾아내서 영화를 한 편 찍었는데 영화에 10곡이 있었어요. 그 중 유행하는 노래가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대륙에서든 대만에서든 불리는 [한족 남자에게 시집갈래]였죠. '굽이진 덩굴은~ 큰 나무 위를 오르고~' 좋죠."


[한족 남자에게 시집갈래]는 영화 [수이파이족의 사랑 (水擺夷之戀)]의 삽입곡 중 하나였다. 당시 영화는 영화 내에서 삽입곡을 많이 사용했기에 영화의 실버 스크린은 유행가를 전파하는 라디오 외에 또 하나의 네모 상자였다.

*파이족(擺夷)은 윈난 성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현재는 다이족(族)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수이파이족은 파이족의 분파.


[차이궈롱]

"그 때 거리엔 음반 가게가 많았는데 손님을 유인하기 위해 가게 앞 스피커에서 쉬지 않고 최신 유행의, 제일 잘 팔리는 그런 노래를 틀었어요. 그러니 당시에 들을 수 있는 노래 중에는 당연히 영화 주제곡이 많았죠."


영화와 노래가 결합하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대만어 영화에서는 이미 유행했던 노래를 주제가로 해서 영화를 찍으면서 가수를 초빙해 영화를 찍고, 노래의 인기를 빌려 영화를 홍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62년의 대만어 영화 [오랜 사랑이 계속 이어지네(舊情綿綿)]는 홍이펑의 히트곡인 동명의 [오랜 사랑이 계속 이어지네]를 주제로 했고, 홍이펑을 데려와 남자 주인공 역을 맡겼다. 영화가 상영되자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랜 사랑이 계속 이어지네]

작사: 예쥔린
작곡: 홍이펑
노래: 홍이펑


[홍이펑/가수, 작사 및 작곡가]

"[오랜 사랑이 계속 이어지네]는 내 노래였으니까 대만 전역 사람들이 이미 익숙했었죠. 다들 잘 알던 노래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오랜 사랑이 계속 이어지네] 영화를 찍으려고 한 거죠. 저는 영화를 찍어 본 적이 없어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계속 망설였어요. 그런데 감독이 어떻게 말했냐 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길을 건너가서 한 마디만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한 마디만 하면 감독이 알아서 절묘하게 잘 찍어 줄 거라고 했어요."


다른 한 종류의 예는 바로 작곡가에게 전문적으로 곡을 맡기는 것이었다. 영화가 나오고 나서 관중은 영화를 보면서 노래를 익히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였다. 


[양산백과 축영대-먼 산이 웃네]

작사: 리주안칭(李雋)
작곡: 저우란핑
노래: 링보


1963년 홍콩 쇼 브라더스가 내놓은 [양산백과 축영대]는 대만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물가가 높지 않고 사람들이 아직 부유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 표 판매가 팔백만 원(*대만 돈)을 기록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보고는 또 봤고, 스무 몇 번이나 본 사람들도 있었다. 


[차이궈롱]

"홍콩 신문에서 타이페이가 광인들이 모여 있는 곳 같다고 풍자할 정도였어요. 제 생각엔 그게 거짓말이 아닌 게 제가 그 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양산백과 축영대]를 제가 3번 봤거든요. 최고 기록이야 여든 몇 번 봤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요."


[링보/배우]

"처음부터 그렇게 인기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입소문이 좋게 나면서, 제가 듣기론 나온 지 2주 정도 지나서 이렇게 인기가 있게 됐다고 하더군요."


[차이궈롱]

"무대 위의 실버스크린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노래하고 있으면 무대 아래 사람들도 다같이 노래하고 흥얼거리고 있었어요. 무대 아래에선 이미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요.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다들 영화를 몇 번 씩 봤단 걸 알 수 있죠."


[양산백과 축영대-영대를 방문하다]

작사: 리주안칭
작곡: 저우란핑
노래: 링보


[링보]

처음 귀국했을 때는 민국 52년(1963년)이었어요. 우리는 금마장(金馬)에 참석하려고 왔어요. 스케줄이 정말 촘촘하고 빡빡하게 되어 있었어요. 비행기에서 내리니까 완전히, 차에 탈 수가 없었어요. 차를 타도 주행을 할 수가 없었고요. 나중에는 경찰이 와서 저를 보호해 줬는데요. 경찰한테 다른 차를 얻어 타서 사람들한테서 숨었고 그래서 공항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죠.

2일차에 거리 퍼레이드를 할 때는 타이페이에 정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고요, 저는 계속 웃기만 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사진: 링보와 저우란핑]


[양산백과 축영대]의 영화 삽입곡 전부가 [푸른 밤의 세레나데]의 작곡가 저우란핑이 쓴 것이었다. 이 영화 삽입곡은 저우란핑이 대만 방송계에서 홍콩 영화계로 옮기면서 쓴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링보]

"그 때 쇼 브라더스는 (의미 불명) 저우란핑 선생을 요청해 홍콩에 그를 데려와 [양산백과 축영대] 영화 음악을 쓰게 했죠."

"당시에 녹음은 어땠냐 하면, 하루에 서너 곡밖에 녹음을 하지 않았어요. 녹음실에 가면 악보를 가져오고, 그러면 저우란핑 선생이 한 번 불러 봤죠. 그러고 나서 가수가 도레미파솔 이런 건 자기가 익혀야 되고, 그러니까 현장에서 배워서 현장에서 사용하는 그런 방식이었죠."


[양산백과 축영대]는 대만에서 황매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1964년 중화방송은 황매조 노래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11세밖에 되지 않았던 덩리쥔이 [영대를 방문하다] 이 곡으로 1등을 차지했고, 이렇게 대만 가요계의 거성이 가요계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양산백과 축영대]가 대만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쇼 브라더스는 대만에서 영화음악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대만 현지의 음반사가 제각각 각종 루트를 거쳐 영화 음원을 얻은 다음 각자 영화음악 앨범을 내게 되었다. 일순간 각종 양산백과 축영대 음악 앨범이 대만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링보]

"이거 말해도 되나요? (웃음) 대만에 해적판 음반이 너무 많아서 EMI가 대만에 안 온다는 말이 있었어요."


1960년대 새로 설립된 하이샨(海山)과 리거(麗歌) 레코드는 모두 처음에는 자체 제작한 해적판 음반을 주로 생산했다. 하이샨 레코드의 구이린(桂林) 사장이 당시의 여러 음반사에서 경쟁적으로 해적판 음반을 제작했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구이린청청 (桂林琤琤)/하이샨 레코드 사장]

"머리를 써야 했죠. 기계실 쪽으로 가서 카피해 달라고 좀 부탁을 하면 돌아와서 음반을 네 장 만들 수 있었어요. 그 중에서 듣기가 좀 좋은 걸 골라서 세 장으로 만들었죠. 반응이 좋았어요. 다른 회사는 우리보다 더 똑똑해서, 그 사람들은 들으면서 녹음을 하고 대사까지 다 녹음해 넣어서 음반을 다섯 장 만들었어요. 음반이 다섯 장이면 더 잘 팔렸고, 들으면 꼭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죠. 경쟁이 점점 심해지니까 10인치 음반이 12원에서 7원까지 가격이 내렸어요. (웃음)"


[천춘메이 (陳春梅)/리거 레코드 사장]

"플라스틱 파는 것도 아니고, 음반 한 장이 5, 6원밖에 안 했어요. 음반사한테 돌아가는 이윤은 얼마 없었죠. 게다가 당시 중국어 가요의 추세가 벌써 거기까지 퍼져서, 사람들이 모두 음반을 제작해서 이윤을 좀 얻어볼까 하고 있었죠. 사람들이 다들 하니까 우리도 좀 해 볼까 했어요. 원가가 많이 들어가긴 하지만 원래 사업이란 게 한 번 해 봐야 되는 거잖아요."


하이샨 레코드와 리거 레코드는 대만 전후의 2세대 음반사 중 중요한 회사들이다. 초기에 이 두 회사는 모두 해적판 음반 제작을 주로 했다. 하지만 해적판 음반 시장의 경쟁이 점차 과열되고 이윤이 점차 적어지자 이들은 오리지널 음반을 만드는 것으로 사업 계획을 전환하게 되었다.


[구이린청청]

"민국 54년, 53년에 상품 전람회가 하나 있었는데, 싱가폴에서요. 우리도 참가했죠. 그 때 우리가 음반을 한 장 녹음했는데 [품 안의 슬픔 (懷抱的傷悲)]이었어요. 그걸 수출하려고 하니 해적판 음반으로는 수출이 안 되는 거예요. 정식 음반을 만들어야 수출할 수 있었죠. 해외 사업을 하려면 그랬었죠."


해적판 음반에서 정식 음반 제작으로 전환한 이 회사들은 자기 음반을 제작할 뿐 아니라 음반 제작 설비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천춘메이]

"민국 57년에 우리가 신좡(新莊)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때는 뭘 하든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품질도 좋게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일본 기계를 수입해 왔어요. 일본 기계를 들여온 뒤에는 품질이 전부 다 좋아졌어요. 그 뒤에는 기계를 늘이려고 바로 미국에서 기계를 수입해 왔죠. 품질을 좀 향상시켜 보려고요."


1962년 허종 레코드(和眾唱片)에서 메이다이(美黛)의 앨범 [잊을 수 없어(意難忘)]를 발매했다.


[잊을 수 없어]

작사: 션즈 (慎芝)
작곡: 사사키 준이치 (佐々木俊一)
노래: 메이다이


[차이궈롱/영화평론가]

"방송에서 노래를 들으면 머릿속에 치파오를 입은 작고 깜찍한 메이다이가 흔들거리는 모습이 떠올랐죠. (웃음) 메이다이한테는 그런 사람을 움직이는 매력이 있었어요."


[잊을 수 없어]의 원곡은 리샹란(李香蘭)이 부른 [동경야곡(東京夜曲)]이다. 당시 중광에서 [歌壇春秋]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션즈가 원곡에 중국어 가사를 다시 붙인 것이다. 


[메이다이/가수]

"막 경제 성장기였는데, 절 도와서 곡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션즈뿐이었어요. 그녀가 쓴 게 제일 많았어요. ([잊을 수 없어]는 제가 맨 처음 녹음한 곡이 아니라 그 전에도 부른 사람이 있었는데 인기를 못 얻었던 곡이었어요. 저는 노래책을 뒤적이다가 그 노래를 골랐어요. 노래가 좋아 보였거든요.

당시 인구가 700만이었는데 제가 백만 장을 팔았어요. 제가 나중에 르신 무대(日新歌廳)에서 노래를 부를 때 거기 사장이 가르쳐 준 수치예요. 그 사람이 저한테 [잊을 수 없어]가 얼마나 팔렸는지 아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모른다고 했죠. 음반사에선 그냥 돈이 엄청 된다는 말만 했거든요."


[잊을 수 없어]의 경이적인 판매량은 대만 대중가요의 또다른 이정표가 되었고, 중국어 대중가요 시장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중간 광고]


[26:45]

[잊을 수 없어]가 발매된 그 해에 대만의 첫 TV 방송사 대만방송(台視)이 정식 개국했다. 이로부터 대중가요의 전파 경로가 원래의 라디오 방송국과 영화관으로부터 TV라는 네모 상자로 이동하게 되었다.


[차이궈롱]

"1962년 대만방송이 개국했고 1963년에 대만의 공업 생산액이 처음으로 농업 생산액을 초과했어요. 공업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죠. 당시 사회에 있어서 이런 상황은 폐쇄 사회에서 개방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별들의 노래(群星頌)]

작사, 작곡: 션즈
노래: 칭샨(山)


대만의 첫 TV 가요 프로그램 [별들의 모임(群星會)]은 대만방송의 개국과 함께 대만 거리마다 울려퍼졌다. 


[왕치메이(汪其楣) /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곡의 작사가 션즈 이야기(歌未央-千首詞人慎芝的故事)] 저자]

"민국 51년 10월 10일은 대만방송의 개국일이었고, 바로 국경일이기도 했는데요, 축하 행사가 타이페이 빈관(台北賓館)에서 열렸어요. 프로그램이 TV에서 방영될 때는 앞에 먼저 국경일 열병식 동영상이 있었고, 총통 원고 낭독, 그리고 만화가 방영되고 다음으로 가요 프로그램이 나왔어요. 옆에서는 션즈 등이 제작하고 사회를 맡은 [별들의 모임] 가수들의 노래가 나왔죠. 

이 프로그램은 방영되고 나서 바로 고정 프로그램이 됐어요. 일 주일에 두 번, 국어(중국어) 가요 프로그램 [별들의 모임]이. 그러니까 당시엔 대만에 TV 방송국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중 사람들이 모두 주목하던 프로그램이 이 프로그램이었어요."


[별들의 모임] PD 션즈(慎芝)와 관화스(關華石)는 원래 라디오 방송국에서 가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홍이펑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바로 전에 배정되어 있었다.


[왕치메이]

"지루샤 여사가 그랬는데, '집에서 빨래하면서 관화스하고 션즈가 하는 프로그램을 듣다가, 빨래를 다 하고 다시 달려가서 내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불러도 시간이 늦지가 않아!' 라고요. (웃음) 그리고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사람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노래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특정한 노래를 발굴하거나 아니면 특정 가수의 노래, 특정 영화의 노래를 한꺼번에 소개하거나 했죠. 사람들이 다들 이런 음악 프로그램에서 만족스러운 음악 지식을 얻거나 노래 방식에 대해 알게 되거나, 노래를 듣는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된 것 같아요."


션즈와 관화스는 여러 해 동안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을 진행한 경력이 있기에 [별들의 모임] PD로 초빙되었다. 


[칭샨/가수]

"당시 TV는 즉석에서 녹화를 했잖아요. 예를 들어 우리가 오후 12시에 방송을 내보낼 거면, 아니면 1시에 내보내면, 아침 9시까지는 방송국에 다들 와야 했어요. 화장도 하고 밴드는 연습해야 하면 연습하고, 약 10시쯤에는 PD가 현장에 도착하죠.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한 번 쭉 PD에게 보여줍니다. 노래의 내용이나 가사는 PD가 이미 가지고 있고, 그리고 조명도 있고. 

왜냐하면 당시 [별들의 모임]에 있어서 션즈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정말 엄격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션즈가 노래까지 다 지정을 해 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옷은 노래의 내용에 맞는지, 이런 것도요."


[시에레이(謝雷)/가수]

"남자 가수의 경우에 션즈가 꽃무늬에 화려한 옷은 못 입게 했어요. 항상 양복을 입으라고 했죠. 그래서 저는 위엔환(圓環)에 가서 중고 옷을 샀어요. 어느 날 션즈가 '저한테 그 옷 본 것 같은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맞다고 했죠. 저는 그 한 벌밖에 없었거든요. (웃음) 제가 그 옷을 일곱 번을 입었어요. 다 똑같은 걸 입었죠. 그리고 션즈는 가수가 막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안 좋아했어요. 노래를 할 때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도 거울 앞에 서면 몸이 얼어요. 몸을 안 움직이죠. 그게 습관이 돼서 그래요. 가수가 부르는 노래도, 션즈가 노래를 골라주면 아무렇게나 노래를 부르면 안 됐어요. 속도가 빠른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고, 춤을 추거나 하는 것도 안 됐고."


[왕치메이]

"TV는 직접적으로 화면이 있고 게다가 가족들의 밥상 앞에 놓여 있었거든요. 션즈 같은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면서 이런 전달 방식이 라디오 방송의 아무 노래나 부르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죠. TV가 만들어 내는 느낌은 무대에서 노래를 듣는 것과 다르고요. 그래서 그들이 이 프로그램을 제작했을 때는 무대를 그대로 화면 안으로 옮기려던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 때 프로그램에는 무용도 있었어요. 차이뤼위에(蔡瑞月) 선생, 그리고 우리한테 익숙한 더 나중의 추이롱롱(崔蓉蓉)이나 차오진링(曹金鈴) 같은 발레 명사를 초빙했죠. 관화스 선생은 방송 현장에서 이런 무용에 맞춰 바이올린 반주를 했어요. 션즈는 무대 뒤에서 무용에 맞춰 노래를 했고요. 그러니까 션즈가 프로그램의 사전 작업을 정말 상세하게 한 거죠. 무대 연습도 굉장히 정교했고요. 가수의 의상이나 화면의 전체적인 표현 등을 모두 세밀하게 디자인했어요."

"당시의 [별들의 모임]에서는 알게 모르게 가수 커플을 계속해서 탄생시켰어요. 예를 들면 당시의 시에레이와 장치(張琪), 칭샨과 완취(婉曲), 그리고 또 더 많았죠. 한 쌍 한 쌍... 가수들의 노래만 퍼진 게 아니라 그들의 사생활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어요."


[살구꽃 계곡의 사랑(杏花溪之戀)]

작사: 스투밍(司徒明)
작곡: 야오민(姚敏) (메이웡 梅翁)
노래: 칭샨, 완취


[별들의 모임]의 인기에 힘입어 칭샨과 완취, 시에레이와 장치, 위티엔(余天), 시아신(夏心), 란샤오링(冉肖玲), 야오수롱(姚蘇蓉), 덩리쥔(鄧麗君) 등 대만 가요계의 스타들이 하나하나 탄생했다.


[천춘메이/리거 레코드 사장]

"당시 [별들의 모임]에서 뜬 스타가 정말 많았어요. 또 [기쁨의 만남(喜相逢)], 추이타이징(崔苔菁)이 사회 보던 [비취빛 피리와 은빛 쟁(翠笛銀箏)]도 있었고요. 이 세 프로그램에서 정말 많은 가수들이 스타가 됐어요.

인기를 얻으려는 가수가 있으면 방송국에서 방송을 내보내야 뜨게 되니까 우리도 방송국에 협조를 해야 했어요. 뭐든 다 해야 했죠(웃음). 가수를 데려와서 노래를 시키거나 사진 촬영에 협조하거나 뭐든 다 해야 했어요. 예를 들면 [바보와 들 계집애(瓜與野頭)] 그 노래는, 계집애가 소 등 위에 앉는데 그 소한테 맨 끈까지 제가 다 잡아끌고 있어야 했어요. 거기다가 농가에 가서 빌리기까지(웃음). 우창지에(오상가/五常街), 그 땐 우창지에가 완전히 다 논이었는데요, 집도 없었고요. 거기 가서 그 소를 빌렸어요(웃음)."


국어(중국어) 가요의 유행은 [별들의 모임]의 인기뿐 아니라 당시 정부가 추진한 국어 보급 정책과도 관련이 있었다.


[차이궈롱]

"국어 보급, 그리고 국어 가요 보급, 두 글자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 사실 분위기를 보면 서로 통하는 성격이었죠."

"중남부에서는 원래 국어를 못 알아듣거나 또는 국어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도 국어로 된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를 이해하고, 듣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것도 필연적인 하나의 추세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퍼져 가면서요."


[좡누]

"그 때 영화, TV 방송국, 음반사, 국내, 해외,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어디에서든 다 영화를 촬영했어요. 다들 음반도 냈고, 다들 돈을 벌고 싶어했죠. 생활 조건도 점점 더 나아졌고 사회가 번영하게 됐어요. 

당시 영화 한 편에 나오는 노래가 최소 두 곡, 세 곡, 네 곡, 다섯 곡까지도 있었는데요. 첫 번째로는 좋은 노래가 이렇게 나왔고, 두 번째로는 영화의 판권이 국외에 팔려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 화인(華人)들이 영화를 보게 됐는데요, 화인들이 영화 속 노래를 통해서 중국어 연습을 할 수 있었어요. 일본이 대만을 50년간 점령하면서 화인들과 격차가 생겼잖아요. 국어를 잘 못 했는데, 그래도 노래는 국어 노래를 들었어요. 영화 한 편에 노래가 여러 곡 있었고, 음반 산업도 그러니 잘 되었죠."


[천춘메이]

"그것도 잘 된 일이죠. 당시 시장에서 음반이 잘 팔렸어요. 우리 리거 레코드의 첫 국어 음반이, 장치 씨가 부른..."


[연인의 다리(情人橋)]

작사: 후바오(胡褒)
작곡: 미상
노래: 장치


[천춘메이]

"장치는 목소리가 꾀꼬리 같았어요. 깨끗하고 예쁘고. 들으면 편안하고. 그 때 제 첫 앨범이니까 꼭 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시에리셩(謝生)에게 부탁했어요. 그 때 그 사람이 대만방송에서 편곡과 지휘를 했어요. 제가 당시 밴드는 16명짜리 밴드를 썼어요. 반주 음악을 먼저 녹음하고 그 위에 가수가 노래를 하는 요즘과는 달랐고요, 그 때는 에어컨도 없고, 녹음실에서 얼음을 사 와서 얼음을 물통 안에 놓고 물통을 몇 개나 쓰고 그렇게 했어요. 선풍기를 켤 수도 없었어요. 선풍기를 켜면 잡음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만약 어느 하루 연주가 잘 안 되면 바로 그 다음날로 미뤄졌고요. 그러니까 들어가는 돈은 생각하지 않고 이 앨범을 꼭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결과적으로 당시 장치의 [연인의 다리]가 대만 전역을 휩쓸게 됐어요."


[구이린청청/하이샨 레코드 사장]

"앨범을 팔고 나면 뭐랄까, 다른 사람들한테 이걸 넘겨준 기분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커버 곡 부르는 것처럼 음반을 가지고는 다른 가수를 불러서 이렇게 부르라고 주문했거든요."


시장에는 여전히 해적판 음반이 많았고, 따라서 복제판에서 오리지널 음반 제작으로 전업한 음반사는 해적판 음반과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구이린청청]

"우리가 직접 가서 잡았어요. 밤 1, 2시에 어디에서 수증기하고 연기가 올라오는지 봐서, 올라오면 아 저기서 해적판 만드나보다 하고 알았죠. 그래서 그 다음 날 밤 두 시 쯤 직원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잡았어요. 잡을 때 앞문하고 뒷문은 먼저 사람이 가서 막고 있고(웃음) 경찰이 안으로 들어갔어요. 몰수했죠."


[천춘메이]

"단속한 다음에 내정부(內政部)에서 증명서를 떼 주는데 그게 있어야 법원에 고소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고소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게 3개월치 벌금을 내거나 최대 6개월치 벌금을 내는데, 벌금을 낸다고 이 사람들이 무서워하지를 않았거든요. 그리고 또 저한테 어떻게 한다고 하고. 피를 보고 싶냐고 협박하거나(웃음) 이런 식으로 험한 말을 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험한 말을 듣는다고 우리가 단속을 안 나설 수가 있었겠어요. 단속은 계속 나가야 했죠."


대중음악 시장이 갈수록 커지면서 음반사에서도 전문적인 홍보 방법을 하나하나 개발하기 시작했다. 


[천춘메이]

"첫 번째는 TV에 내보내는 거였죠. 이게 제일 중요했고요. 두 번째로는 가수를 전국 라디오 방송에 보내서 인터뷰를 시키는 것. 세 번째는 신문에 싣는 거였어요."


[구이린청청]

"당시 음반이 잘 안 팔리면 어떻게 했냐 하면, 우리가 연합보(聯合報)에 전면 광고를 세 개 냈어요. 앨범을 말레이시아에서 몇 장 주문했고 싱가폴에서 몇 장 주문했다는 식으로요. 전부 허풍이었죠(웃음). 다들 광고를 보고는 '우와, 해외에서 이렇게 잘 팔린다는데, 한 장 사 볼까' 이런 식이었어요."


[천춘메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면 반응을 다 알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내보낸 음반을 우리는 계속 선전하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음반 가게에서는 다시 주문을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 앨범이 잘 팔리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죠. 안 그러면 그냥 조용하고, 다시 사러 오는 음반 가게가 없고요."

"당시 중화루(중화로/中華路)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음반 가게가 열 몇 곳이 있었는데요, 콜롬비아(哥倫比亞), MGM(米高海), 유니버설(環球), 리엔메이(聯美) 등등 열 몇 곳이 있었어요. 음반가게가 모두 거기 있으니까 우리도 장사하기가 쉬웠죠. 우리 앨범이 나오면 전부 거기로 보내면 되니까요. 작은 음반가게는 모두 거기 가서 물건을 들여오기도 했어요."


대만 대중가요는 동남아의 오락 산업 판도를 바꿔놓기도 했다. 그 전에는 홍콩의 영화와 노래가 대만에 들어왔던 것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별들의 모임]의 가수가 홍콩,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각자 공연을 하며 많은 해외 팬들을 끌어모으며 '대만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중간 광고]


[41:10]

[칭샨/가수]

"상하이 시기의 노래가 대륙에 간 후에는 힘을 못 쓰게 되는데, 대륙 쪽에서는 대중가요 부르는 게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그랬죠. 그러니까 대중가요는 홍콩에만 있었고, 홍콩이 제일 큰 기지였어요. 그 이후 대만의 가수들이 홍콩에 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신선한 현상이었죠."


[눈물의 작은 꽃(淚的小花)]

작사: 션즈
작곡: 한국 곡 (*원곡은 남진의 [미워도 다시 한번])
노래: 칭샨


[칭샨]

"당시 홍콩에서는, 제 생각에 아마 70년 이후일 텐데, 홍콩 연예 신문을 펼쳐서 보면 거의 모든 가요 무대, 나이트클럽(夜總會)에 대만 가수가 메인으로 나왔어요."


대만 가수들이 해외에서 큰 환영을 받는 동시에, 대만 현지의 창작자들은 일본, 한국 및 서양의 대중가요에 국어(중국어)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별들의 모임] 제작자 션즈는 당시 가장 유명한 작사가 중 하나였는데, 그녀의 가사는 감정이 풍부하고 우아했으며 이는 국어 대중가요에 있어 대만 특유의 색채를 드러냈다.


[왕치메이/[노래는 끝나지 않았다-천 곡의 작사가 션즈 이야기(歌未央-千首詞人慎芝的故事)] 저자]

"민국 35년(1946년)에 션즈 여사가 상하이에서 타이페이에 왔어요. 민국 38년에 관화스 선생이 타이페이에서 일을 시작했고요. 그들은 물론 대만 현지의 음악도 많이 접했고, 그 외에 일본 노래나 클래식 혹은 서양 음악도 접했죠. 이런 여러 종류의 음악은 계속 대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바로 이런 다양한 음악이 대만 각지의 풍부하고 복잡한 소리기도 했어요. 

나중에 노래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공연할 장소도, 음반사도 많아졌거든요, 그래서 서양 노래, 일본 노래의 멜로디를 대량으로 사용하게 된 겁니다. 일본 외에 한국, 그리고 대만어 노래의 멜로디도 있었고. 그리고 션즈가 기존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서 노래의 주인공인 여자 혹은 남자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표현해 냈죠. 이렇게 새 노래로 출시되어서 사람들에게 불리게 된 거예요."


[칭샨]

"션즈 스스로도 노래를 잘 했어요. 그래서 노래에 대해서 잘 알았고요. 션즈가 노래하는 사람은 매일 노래를 할 게 아니라 가끔 노래를 멈추고 자기 노래를 스스로 들어봐야 한다고 하더군요. 매일 노래만 하면 점점 기교는 늘어도 감정이 없어진다고."


[왕치메이]

"1968년에 션즈는 혼자서 1년간 200여 곡을 썼어요. 물론 [별들의 모임] 때문은 아니었고, 음반사와 여러 가수들 때문에 쓴 거죠."


예쥔린, 좡누에서 션즈까지, 이러한 뛰어난 작사가들은 뛰어난 문예적 재능을 통해 외국에서 온 곡에 현지의 목소리를 입혔다.


1950, 60년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대만은 태평양 열도선(island chain)의 중심 축, 또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있어 미국의 동료가 되었다. 미국은 대만에 대량의 원조를 제공하는 동시에 대만에 현대 공업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제7함대를 보내 대만 해협을 방어했다. 이와 함께 대만은 1949년부터 이어진 국공 분열과 천도 이후의 혼란을 지나서 안정 정국에 접어들게 되었다.


많은 미군이 대만에 와서 휴가를 보냈고, 미군 기지와 미군 클럽이 대만에 만들어졌다. 또한 미군 라디오 방송도 있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차트 순위에 있는 서양 히트곡을 트는 곳이었다.


[진주링(金祖齡)/가수]

"제 기억으로 당시 저희는 종종 샤오메이(小美) 빙수 가게에 가서 빙수를 먹었어요. 그 때 대만 날씨가 되게 더웠거든요. 그러면서 샤오메이 빙수 가게에서 서양 노래를 많이 트는 걸 들었죠. 서양 노래를 듣고 나서는 '어? 이상하다. 음악 박자나 리듬, 화음, 멜로디 이런 게 우리 중국어 가요나 경극하고는 다르네'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서양 가요에 그 때 많이 빠져들었어요."


[리쇼추안(李壽全)/가수, 프로듀서]

"그 때 제 경우 핵심은 뭐였냐 하면, 그 많은 라디오 채널이 있었지만 저는 그 중 딱 한 방송국만 들었다는 거예요. 다른 어느 방송국에서 트는 음악이든 저한테 있어서는 자극이 되거나 매력이 있지 않았거든요. 당시에 제가 생각했던 게 '언제 우리 대만 음악도 미군 라디오 채널에서 트는 음악처럼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였거든요. 그게 음악에 있어서 제가 처음으로 '이렇게 되길 바란다'라고 생각한 때였어요."


이러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서양 가요 대회를 열고, 학생들이 스스로 밴드를 만들어 참가하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뛰어난 밴드는 미군 기지에 데려와서 연주를 시키기도 했다. 한순간 서구 음악이 젊은 학생들에게 가장 세련된 음악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진주링]

"중산베이루(중산북로/中山北路)에 해군 클럽이 하나 있었고 이름이 Sea Dragon Club이었어요. 여기 와서 공연할 밴드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우리가 시범공연을 한 뒤 거기서 공연을 하기로 고용이 되었어요. 그 때 우리가 번 돈이 7천 6백원이었는데, 한 달에요. 정말 엄청난 돈이었죠. 제 아버지가 철도청(鐵路局)에서 부주임기사(副總工程師)로 일하셨는데 한 달에 보너스다 뭐다 전부 합쳐서 받으신 돈이 9백 원이었거든 요. 아버지가 저한테 월급이 얼마냐고 하셔서 7천 6백원이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뭐라고?!'라고 하셨죠."


[리쇼추안]

"제가 생각하기엔 미군이 대만에 미친 영향은 음악 분야에서 가장 뚜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미군을 통해 서구 음악이라는 양분을 섭취하기 시작한 거죠. 그 시기는 대만에서, 국민당이 대만에 온 이후 비교적 안정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가 민국 40년(*1951년) 정도이기도 한데요, 민국 40년 즈음 태어난 아이가 마침 민국 육십몇년에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게 되었죠. 이 아이들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하니까 음악을 가서 듣거나 직접 할 수도 있게 됐고요. 그랬기 때문에 서양 음악을 접하고 나서, 보고 따라했든 아니면 반성적인 태도를 가졌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게 될 수 있었던 거예요."


1969년 대만의 두 번째 TV 방송국인 중국방송(中視)이 개국했다. [별들의 모임] 등 인기 가요 프로그램이 있는 대만방송(台視)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 중국방송은 드라마에 중점을 뒀다.


[징징(晶晶)]

작사: 원쿠이(文奎) 
작곡: 구위에(古月) (줘홍위안 左宏元)
노래: 덩리쥔


개국 후의 첫 연속극 [징징]은 양안(兩岸)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혼란 속에서 징징(晶晶)이라는 이름의 어린 여자아이가 어머니와 각자 대만에 와서 서로를 찾으며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속 만날 듯 하지만 다시 엇갈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다. 드라마는 대만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줘홍위안이 작곡하고 원쿠이가 작사, 덩리쥔이 부른 동명의 주제곡도 거리마다 퍼져나갔다. 

[징징]의 성공 이후 TV 드라마의 주제곡은 대중가요가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영역이 되었다. 이후의 [마음 부서지는 사랑(碎心戀)], [주마등(走馬燈)], [사랑의 여행(情旅)] 등 TV 드라마의 주제곡이 모두 히트 음반이 되었다.


라디오 방송, 영화에서 TV까지, 크고 작은 여러 네모 상자 속에서 전 대만인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한 곡 한 곡 흘러나왔다. 다들 함께 노래를 듣던 그 시간 속에서, 역사적인 상황과 이 섬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로 인해 공통의 추억, 공통의 장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집에 안 갈 거야(今天不回家)]

작사: 주거(諸戈)
작곡: 줘홍위안
노래: 야오수


1968년, 바이징뤼 감독의 영화 [오늘은 집에 안 갈 거야]에서는 당시에는 아직 신인이었던 줘홍위안을 작곡가로 기용해 영화 주제곡을 썼고, 가수 야오수롱이 이를 불렀다. 줘홍위안은 서양 록음악의 분위기와 닮은 새로운 작곡법을 활용했고, 게다가 야오수롱은 처음으로 허난(河南) 성의 예극(豫劇)과도 닮은 '야오(姚) 스타일'의 소리치며 노래하는 창법으로 [오늘은 집에 안 갈 거야]를 불렀다. 듣는 사람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야오수롱의 목소리는 대만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에도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창법을 이후 대만 가요계에서 姚派喊唱이라 부르게 된다. 직역하면 야오수롱 스타일의 소리치며 노래하는 방식이라는 말.)


이로부터 아름답고 고요한 푸른 섬, 대만은 중화권 대중음악의 찬란한 중심 무대로 탈바꿈하게 된다.


제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