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대중음악사: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제1부 ~1955년
공식 홈페이지: http://www.pts.org.tw/ptsing/page_before_1955.htm
音樂產業大事記 음악 산업 연대기 | |
1877年 | 에디슨이 <Mary Had A Little Lamb>을 낭독하여 첫 번째 녹음된 목소리가 탄생하다. |
1898年 | 대만에 처음으로 유성기 음반이 들어오다. |
1910年 | 일본인이 대만에 <일본축음기상회 타이페이 출장소>를 설립해 유성기 및 음반 시장 개발, 판매를 담당하다. |
1914年 | <일축>이 대만 현지에서 생산된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하다. |
1920年 | 리진후이(黎錦輝)와 옌쥐펑(言菊朋)이 '명월음악사'를 설립하다. |
1932年 | 롼링위(阮玲玉)가 주연한 《도화읍혈기/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桃花泣血記)》의 홍보를 위해 순순(純純)이 동명의 곡을 불렀으며, 이것이 대만 최초의 대중가요로 평가받게 되다. |
1933年 | 《망춘풍/봄바람을 바라며(望春風)》, 《월야수/달밤의 슬픔(月夜愁)》, 《우야화/비 내리는 밤 피는 꽃(雨夜花)》 등 대만 본토에서 새로 창작된 곡이 전 대만에서 유행하다. |
1941年 | 태평양 전쟁이 전면화됨에 따라 대만 콜롬비아 사가 전쟁의 참화로 파괴되며, 지난 10년간 전성기를 맞았던 대만의 음반 산업이 가동을 멈추다. |
1945年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상하이가 다시 한 번 중국 오락산업의 중심이 되다, 국어(중국 표준어)가 대만 시장에 흘러들어오게 되다. |
1947年 | 「소육종/뜨거운 로우쫑(燒肉粽)」이 발표되어 당시의 물가 상승과 서민 생활의 어려움을 반영하다. |
1948年 | 대만 영화계의 첫 번째 중국 표준어 영화 《아리산풍운(阿里山風雲)》이 등장하고 구메이(顧媚)가 영화 주제곡 〈고산청/높은 산은 푸르고(高山青)〉을 부르다. |
1949年 | 국공 내전이 끝나 2백만 명의 정부 관원 및 민간인, 병력이 대만으로 후퇴해 오면서 대만에 새로운 청중과 음악 향유 방식이 생겨나다. |
1952年 | 양산랑(楊三郎) 등이 흑묘가무단(黑貓歌舞團)을 조직해 대만에 가무단 문화를 도입하다. 쉬스(許石)의 중국음반사(中國唱片公司)가 산총(三重)에 음반 제조 공장을 설립하다. 천치우린(陳秋霖)이 셩쟈(勝家) 음반 공장을 설립하다. |
1955年 | 여러 영화사가 제작에 투자해 대만어(민남어) 유행가요의 발전이 이루어지다. 미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전세계적으로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생겨났다. 대만에서도 원샤/문하(文夏)와 홍이펑/홍일봉(洪一峰) 등의 대중가요계 아이돌이 등장했다. |
프로그램 소개글
대만은 일본 식민 시기에 20세기를 맞이했다. 당시 가요 및 연예 문화가 크게 유행해 오락산업의 전기(前期)를 형성했으며, 이후에는 공업 혁명의 영향 속에서 일본에서 들여온 녹음, 유성기 및 음반 산업이 변화 및 발전하게 되었다. 1932년에서 39년까지를 '대만 가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대만의 첫 음악 창작자, 가수 및 인구에 회자될 대중가요가 등장하게 되고, 대만 음반 산업의 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이 시기를 대만 대중음악의 첫 황금기라 할 수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만 민간의 여가생활 및 문화는 오락 소비 산업을 위주로 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락 산업이 노래 무대(歌廳), 가무단(歌舞團), 악대(樂隊) 등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양상이 계속되면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멈추었던 음반 산업도 회복하여 생기를 띤다. 초기에는 라디오 방송국 및 현장에서의 라이브 공연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에는 방송의 발달 및 가요계 스타가 방송을 진행함으로써 생기는 흡인력으로 인하여 라디오 방송국이 대중가요를 창작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는 또한 음반 산업이 산업구조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 원인이 된다. 음반 기술은 경제가 안정된 이후 더욱 성숙하여, 음반사가 계속해서 설립되고 이 음반사들이 산업 발전의 주력이 된다.
대만의 대중음악 산업은 근 50년 간 무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방향을 찾아 나갔고, 음반 산업도 위에서부터 아래로까지 완전성을 갖추어 나갔다. 20세기 50년대 말, 산업 전체가 기초를 잡아 나갔고 지금까지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유성기 시대로부터 처음으로 무대 위의 아이돌이 만들어지기까지 대만의 대중가요는 무로부터 출발하여 사람들의 삶과 긴밀한 영향을 맺어 나갔고, 반 세기 또한 이러한 여정이 계속되어 왔다. 1960년에 들어서는 대만에 117개의 음반회사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산업 가치는 백만 달러에 달했다. 오늘날 그 수치는 당시의 4백 배에 달하며, 대만은 중화권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만은 고유의 역사를 거치며 각종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찾아나가는 길을 걸었다. 대중음악 산업 역시 지난 50년 간 기초를 쌓아 두었기에 스타일과 강렬한 적응력, 창조성을 보유한 다원적인 특성을 창조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아이돌이 어떻게 모습을 바꾸어 가든,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노래의 생명일 것이다. 대만 사람들과 1세기 가깝게 함께 해 온 곡들은 시대와 언어, 기억이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속 이어지고 전해져 가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곡: 桃花泣血記、望春風、雨夜花、月夜愁、河邊春夢、白牡丹、四季紅、青春嶺、心酸酸、燒肉粽
이 시기의 대표 가수: 純純、愛愛、郭金發、鄭日清、文夏、紀露霞
방송 내용
대만은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좋아하는 섬나라이다. 백 년 전의 대만은 농업사회일 뿐이었지만 지금 이 곳에는 3200만의 인구가 살고 있고, 대만의 대중음악 산업의 경제적 가치는 수억 달러에 달한다. 각종 언어로 된 대중가요가 대만에 모여 중국어 대중음악의 중심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노래 한 곡이 80여 년을 거쳐 내려오면서 시대마다 다른 환경에 각각 다른 모습을 띠며 적응하고 매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생명력을 낳기도 한다.
대만이 어떻게 고유의 대중음악 산업을 형성해 갔는지를 알아보려면 대만 대중음악 산업의 첫 번째 시기를 알아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시대의 노래를 듣는다
제1부 유성기 시대, 유랑의 춤과 노래
백 년 전, 음악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페라 극장이나 노천 무대에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18세기 말 구미 사회에서는 인쇄업이 활발하게 발달했고, 이에 따라 오페라 음악 중 몇몇이 노래책이나 악보 형태로 인쇄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소리를 원본 그대로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명가들은 형태가 없는 소리를 남기고 보존할 방법을 찾으려 고심했다.
1877년 에디슨이 드디어 음파를 바늘의 진동으로 변환하여 밀랍 관에 새기는 데 성공했다. 바늘이 다시 한 번 궤적을 따라 지날 때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틀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에디슨은 총 8초 간 Mary Had A Little Lamb를 낭독했고 이는 세계 녹음사의 첫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15년 후 독일의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가 원형 축음기를 개량하여 오늘날 우리가 '골동품'이라 말하는 원형 접시 같은 78회전 음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원형 음반은 대량으로 복제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음반도 다른 상품처럼 양산되어 판매되었고, 음악이 이를 통해 음반의 시대에 들어서며 세계 각지에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막 일본에 할양된 대만은 현대화되지 않은 농업 사회 상태였다. 하지만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이 새로운 유성기 기술을 최초로 접해 대만에 들여오기도 했다.
다년간 대만 대중음악을 연구해 온 린량저(林良哲) 씨는 대만 대중음악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거의 모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린량저/대만 대중음악 연구자]
"1898년에 신문 기사가 하나 있었어요. 기사에 따르면 타이페이 다다오청(大稻埕)에 찻집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찻집에 어느 날 중국 광동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찻집 사람들이랑 말하길 '내가 마술을 하나 해 보겠다. 내가 마술을 할 줄 안다'라는 거였죠. 이 마술은 아주 신기했는데, 한 사람이 극단 전체가 내는 소리를 모두 낼 수 있는 마술이었죠. 그래서 그 마술을 해 보는데 방 안은 새까맸고, 거기서 그 사람이 '여러분 잘 한번 들어 보세요' 라고 합니다. 처음 시작하자 북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호금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생(小生)의 노랫소리도 시작하고, 단(小旦)의 노랫소리도 저 한 쪽에서 나고, 이렇게 여러 소리가 동시에 막 나는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서 이게 대체 뭔가 했다고 하죠. 그 마술의 주인공은 바로 유성기 음반이었습니다."
[화면: SP 음반]
이것은 대만에서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음반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식민정책이 음반 보급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19세기 말 일본은 식민지를 대상으로 현대화 유신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고, 당시 민정장관을 맡았던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한편으로는 미디어와 군사 쌍방으로 압박을 가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문예 선전 활동으로서 '부드러운 통치 수단'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4년 고토는 대만의 첫 자선 모금 유성기 음악 감상회를 열었다. 지방 신사에서 일본인들과 총동부가 공동으로 참석하는 음악회였다. 이 현장에서 모금한 액수는 만 원이 넘었다. 이러한 성공의 경험을 통해 고토는 계속하여 여러 차례의 음악 감상회를 열었고, 유성기는 이후 각 학교에 보내져 교육 공구로 쓰이기도 했다. 이는 유성기와 음반이 대만에 보급된 첫 시기였다.
그간 민간의 오락 활동은 대부분 극단의 거자이시(歌仔戲) 공연, 남관/북관(南管/北管) 음악 연주, 거리의 예술인이 월금(月琴)을 켜며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형태 등이었다. 당시 '기계음(機器音)'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성기는 사람들의 오락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고, 유성기는 곧 민간에서 관혼상례 시 쓰이는 오락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당연히 유성기는 유성기 소유자의 신분이나 지위를 뽐내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린량저]
"당시 1909년 做時敏齋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었어요. 유성기와 음반을 팔던 가게였는데, 장사가 그렇게 잘 되진 않았죠. 그래서 주인이 생각해 낸 게, 7월 중순 사람들이 전통극 공연을 하려 했는데 (마을마다 그렇게 공연을 하곤 했죠) 사정이 있어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가게 주인이 '유성기를 빌려 주겠다. 음반도 같이 빌려 준다. 이렇게 하면 사원에서 유성기를 갖고 소리를 틀어서 극을 들을 수 있다'고 한 거죠. 왜냐하면 당시 대만에서 녹음 기술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거자이시 음반은 있었거든요. 경극(京劇) 음반이 당시에 이미 중국에서 대만으로 유입되고 있었던 것처럼요."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수입은 65전이었는데 유성기를 하나 사려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돈을 100일 동안 벌어야 했다. 이런 비싼 가격에다가 음악도 낯설었고 언어 차이까지 있었기에 유성기는 세련된 완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성기가 보급될 수 있는 시장은 넓지 않았다.
일본 상인들에게 있어서 대만은 투자할 만한 시장이었다. 1910년 일본은 대만에 일본축음기상회 타이페이 출장소('일축')을 설립해 유성기와 음반 판매를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 시장과 대만 시장의 언어가 달랐기에 판매 통로가 있더라도 현지 시장과의 연결이 긴밀하지 않았다.
1914년 일축은 대만 현지의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오카모토 칸타로(岡本檻太郎)는 대만 악사 린스셩(林石生)과 십 몇 명의 가수를 데리고 3박 4일간의 배를 타고 일본 도쿄로 향했다. 이들은 처음으로 대만인이 처음으로 스스로 연주하고 노래한 음반을 만들었다. 이후 이들은 다시 대만에 돌아와 음반을 판매했고, 이로서 드디어 시계점이나 잡화점이나 약국에서도 '자기 스스로의 음악'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이 거의 1세기 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황스하오(黃士豪) 씨와 같은 열성적인 수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황스하오/유성기 음반 수집가]
"사실 음반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집집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시골에도 가고..."
"만약 가다가 겉보기에 집이 예전에 돈 있는 사람들이 살던 집 같으면 들어가서 묻는 거죠. 음반 같은 거 뭐 없냐고. 들어가서 물으니까 집 주인이 있다고, 근데 많진 않다고 하는 거에요. 근데 그래서 들어가 보면 가득 쌓여져 있는 거죠. 알고 보니 그 집에 1914년, 그러니까 대만인이 처음으로 음반을 녹음했을 때의 음반이 그 집에 있는 거에요. 그 집에서 7, 80년 동안 먼지에 뒤덮여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이 이런 걸 찾아내는 거고요.
이런 음반을 들어 보면 당시 사람들이 듣던 건 다 남관, 북관 음악이나 채다(採茶), 소곡(小曲) 같은 전통 음악이었죠. 그 때는 유행가랄 게 없었거든요. 소곡(小曲) 같은 것만 있었죠.
그 중에 한 장을 보니까 대만인이 처음으로 녹음을 하던 때는 다들 객가인을 불러다 녹음을 하곤 했는데, 그래서 보통은 다 객가인들의 음반만 남아 있거든요. 그 중에 한 장은 대만어로 되어 있더라고요."
이 음반 [點燈紅]은 현재 발견된 음반 중 최초로 대만어로 녹음된 전통 차고조(車鼓調) 음악이다. 이런 음악은 모두에게 익숙했긴 했지만 '유행'가가 될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았는데, 세련되지도 않았고, 간단하고 기억하기 쉬운 가사나 선율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 신문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도시의 청년들은 이런 음악에 만족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각국은 새로운 경제, 사회, 문화를 건설하기에 바빴다. 베이징의 5·4운동과 도쿄의 다이쇼 민주주의 역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신문학, 신영화, 신교육, 새로운 남녀간의 사회관계가 동아시아 각지에서 맹아를 싹틔우고 있었다. 대만에 있어서는 어떻게 새로운 음악 노선을 찾아 나갈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중간 광고]
[13:08]
1930년 일반 민간인들의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 갔다. 문학가 황더스(黃得時)가 쓴 [메이리다오(美麗島)]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자주 의식을 암시하는 곡인데, 이 노래를 통해 대만인들의 단결 의식이 환기되는 것이다.
30년대는 공업화, 현대화의 시기였고, 전등과 전화, 수돗물이 이미 있게 된 이 시기에 있어 유성기와 음반은 점점 일반인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와 같이 '모던'을 추구하는 시기에 음반사는 적극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드려 노력했다. 1932년 롼링위(阮玲玉)가 주연한 상하이 무성영화 [도화읍혈기/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桃花泣血記)]를 선전하기 위해 영화사는 특별히 영화와 동명인 홍보곡을 만들었고, 영화가 방영되면서 이 곡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가사: 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
"인생은 복숭아나무 가지와 같네
때로는 꽃이 피고 때로는 죽고..."
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예상치 못하게 대만 대중음악사 상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이런 기회를 발견한 것은 당시의 최대 음반사 콜롬비아(古倫美亞) 회사였는데, 책임자 카시노 마사지로(柏野政次郎)는 수하의 가수를 시켜 [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를 취입했다. 이 음반은 시장에서 성공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스스로를 역사 문헌 종사자라고 겸손하게 칭하는 이 분 좡용밍(莊永明) 씨는 대만 문화 연구의 전문가이다.
[좡용밍/대만 역사 문헌 학자]
"여기에서 몇 걸음 안 떨어진 용러극장(永樂戲院)이 바로 [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의 역사적 장소입니다. 거기다 제 생각엔 제가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왜냐하면 제가 살아 있던 그 시기에 그 때의 그 사람들도 모두 건재해 있었고 저랑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거든요. 제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그때 그 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눠 봤기 때문입니다. [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 이 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 왜 그렇게 이 노래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는지 이야기했죠."
"사실 그 주된 원인은 이 노래가 언급하는 소위 결혼의 자유 문제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노래를 들어 보면 가사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이제 이미 문명 사회, 새로운 시대에 왔는데, 연애의 자유도 있어야 한다'라고. 젊은이들이 자유 연애를 누리고 스스로 결혼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거죠. 가사에 '계급의 속박은 해를 끼친다'란 구절이 있는데, 가정에서 미리 정해 둔 속박이 젊은이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겁니다. '혼인 제도를 크게 바꾸어야 한다' 이 구절은 바로 혼인 제도를 바꾸어서 남녀가 스스로의 자주권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거죠. 30년대에 왜 이런 유행가가 이렇게 널리 퍼지고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곡이 많았는가. 이런 것도 시대적 배경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시노(柏野)는 [복숭아 꽃이 피눈물을 흘리다]의 시장 경험에서 대만어 유행가의 잠재력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덩위시엔(鄧雨賢), 리린치우(李臨秋), 저우티엔왕(周添旺), 야오잔푸(姚讚福), 쑤통(蘇桐) 등 많은 작곡, 작사가를 찾아가 많은 노래를 만들었고 음반으로 취입했다. 대부분의 앨범이 잘 팔렸다. 각 음반사가 이를 따라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음악이 '모던 도시'의 생활 스타일을 불러오기도 했다. 이러한 유행가요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전통 속에서 새로운 선율을 찾고, 거기다 한문을 기반으로 한 가사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제1기 대만어 유행가요는 유장하고 심오한 가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음반사에서는 종종 사랑을 이 제1기 유행가의 가사 소재로 택했다. [망춘풍/봄바람을 바라며(望春風)], [우야화/비 내리는 밤 피는 꽃(雨夜花)], [하변춘몽/강변의 봄 꿈(河邊春夢)] 등은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이다.
[덩타이차오(鄧泰超)/덩위시엔의 손자]
[사진: 봄바람을 바라며/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의 작곡자 덩위시엔]
"이 사진은 어느 음악회의 상황을 나타낸 사진인데, 그 중 피아노를 치는 분은 제 조부이고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조부는 화장실에 가서도 여기저길 두드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나오곤 했다고 합니다. 화장실 안에서 선율을 생각해 내곤 했던 거죠."
"우야화 이 곡은 원래 동요였어요. 그 때의 제목은 [봄날(春天)]이었고요. 작사자는 랴오한천(廖漢臣)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곡은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이후 저우티엔왕 선생님이 곡에 가사를 새로 붙여서 제목을 [우야화]라고 했던 거죠."
함축적이고 슬픈 이 옛 노래([비 내리는 밤 피는 꽃])는 오늘날까지도 모두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이 노래에는 사실 슬픈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서, 저우티엔왕은 어느 날 불쌍한 한 술집 여성이 기녀로 전락하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시골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서로 사랑에 빠졌는데, 남자아이가 타이페이에 가고 난 뒤 소식이 끊어졌고, 여자아이는 슬퍼하다가 타이페이로 올라와서 소식이 끊긴 애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여자아이의 애인은 그 사이 타이페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장가를 간 것이었다. 여자아이는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고 생각해 번화한 타이페이에서 술집 일을 하게 되었다.
저우티엔왕은 [봄날] 이 곡의 선율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이 이야기를 가지고 새로 가사를 썼고,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이 탄생했다. 곡은 나오자마자 크게 성공했는데, 가사가 통속적이고 선율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린량저]
"제 일기에요. '2006년 9월 15일 [비 내리는 밤 피는 꽃]를 찾다'
가서 찾을 때를 생각해 보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음반 사이를 막 뒤졌는데, 음반 무더기의 맨 밑을 보니 바로 그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이게 아마 그거일 거에요. 왜냐하면 콜롬비아사 거거든요. 로고를 보고는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쪽에서 '거기 노래 제목 뭐라고 써있는지 말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 면에 있는 노래 제목이 잘 안 보인다'고 했죠. 그러자 그쪽에서 '그럼 반대쪽을 봐라'고 했죠. 보니까 '不敢' 어쩌고 라고 써있는 거예요. 나머지 한 글자가 잘 안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그 글자는 叫'라고 가르쳐 주더군요. 거기서 말하길 '사장한테 가서 이 한 장에 얼마인지 조용히 물어봐라. 사고 나면 바로 나와라. 말해주지 말고. 말해 주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 말해 주고 나면 그쪽에서 너한테 안 팔려고 할 거다'라고요."
(* [비 내리는 밤 피는 꽃(雨夜花)]이 담긴 초기의 SP 음반은 현재 몹시 희귀한 음반인데, 이 음반에 담긴 또 하나의 곡이 不敢叫였음. 린량저가 구한 음반을 보면 글씨가 바래서 雨夜花란 글자는 잘 안 보이는데, 不敢이라는 글자가 있는 걸 볼 때 不敢叫가 수록된 음반이고, 그러니 雨夜花 수록 음반이라는 것을 추측 가능. 만약 음반 주인이 이게 우야화가 담긴 음반이란 걸 알게 되면 절대 안 팔 것이므로 정보를 흘리지 말고 사서 빨리 들고 나오라는 뜻)
"그래서 저는 그 때 그 음반을 찾으면서 음반 수집에 더 열의를 갖게 됐죠. 이 우야화 음반은 정말, 수량도 적었고, 정말 유명한 노래기도 하고, 제가 얻은 첫 번째 음반이라고 할 수 있죠. 정말 멋진 음반이에요."
"저는 유성기를 사찰 입구에 들고 가는 걸 좋아해요. 음반을 찾다가 사찰 입구에 노인 분들이 있는 걸 보면 음반을 틀어서 그분들께 틀어 드리고 싶어지죠. 소리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면 노인 분들은 마치 스무 몇 살, 서른 살 같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하죠. 1930, 40년대의 그 때 그 시절이 그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에요."
[황스하오]
"제 할아버지 시절에는 그분들이 처음 [봄바람을 바라며]나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을 들었을 땐 몰래 들으셨을 거에요. 왜냐하면 그런 건 당시의 사회 도덕과는 달랐거든요. 당시의 도덕이라 하면 부모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이 사람하고 시집가라고 하면 시집가고, 이 사람에게 장가가라 하면 장가가고, 하지만 이 때의 젊은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죠. 이들은 비교적 개방된 사상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자기 초등학교 때의 학교 친구랑 예전에 손을 잡아 본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 친구랑 결혼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 젊은이들은 이런 노래를 몰래 숨어서 들은 거에요.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듣기는 어려웠죠. 자기 생각을 완전히 떳떳하게 드러내 놓기 어려웠으니까. 대신 이 노래가 자기 생각을 표현해 준 거죠. 그러니까 몰래 부르고 다녔을 수도 있고. 그리고 부르면서도 약간 거리끼는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가사: 청춘령/청춘의 언덕(青春嶺)]
"두 사람이 청춘의 언덕에 가네..."
이런 노래를 통해 당시 대만이 현대화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사교의 방식이 들어오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관념도 바뀌게 되었다.
[가사: 청춘의 언덕]
"자연스럽게 음악의 소리를 연주하네
아아 청춘의 언덕,
청춘의 언덕에 자유롭게 가네"
가사는 간단하고, 선율은 아름답고, 사랑을 노래하는 이런 노래가 당시의 '기준'이 되었다. 몇 년 만에 대만어 노래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이다. 게다가 이 음반이 동남아의 민남어 계열 국가에 팔리기도 했다.
음반 산업이 발달해 나간 동시에, 일본의 군국주의로 인해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차대전 후의 자유 및 개방적인 분위기는 정치인들과 군벌들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봄바람을 바라며], [비 내리는 밤 피는 꽃] 등의 노래가 대만 전역에서 인기를 얻던 이 시기, 9·18사변, 1·28 상하이 사변, 루거우차오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식민지였던 대만은 오래지 않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려 넣어졌다.
1937년 총독부는 대만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는, 음악을 통해 보국하여 황국 문화화를 추진한다고 하는 정책적 간섭이 시작되었다. 날이 갈수록 일반 민중들에게 환영을 받는 대만의 음악인들이 총독부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되고, 소위 '대만어 애국 가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애국 정서를 반영하게 된 [송군곡/님을 보내는 노래(送君曲)] 등의 대만어 노래가 나타났다. 이런 노래는 전쟁에 투입된 대만 군속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자신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몰랐고, 그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은 한편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픔을 마음에 품고 남편이 중국에 가서 전쟁을 하는 것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가사: 님을 보내는 노래]
"送阮夫君袂起行
目屎流入沒做聲
右手舉旗左手牽子
我君阿…
做你去打拼 家內放心免探聽"
전쟁이 날로 가속화되면서 일본 식민 정부의 탄압 정책도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익숙히 알려진 대중가요가 가장 좋은 탄압의 도구가 되었다. 원래 사랑 이야기였던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에도 가사가 다시 붙어 천황의 명에 복종해 모래 전장을 누빈다는 내용의 군가가 되었다. 작곡가 덩위시엔이 唐崎夜雨라는 가명으로서 다시 곡을 썼고, 원래의 아름다운 선율은 웅장한 행진곡이 되었다.
[린량저]
"그[덩위시엔]가 쓴 유명 대표작이 시국에 맞게 다시 쓰여졌을 때 사실 그는 몹시 괴로워했죠. 왜냐하면 그 곡들이 당시 일본 정부의 정치 선전, 강령 선전에 쓰이면서, 대만인이 전장에 나아가서 종군하고 중국인과 싸우라는 식으로 사용되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로서는 매우 괴롭고 슬픈 일이었죠. 하지만 그 시대에는 그로서도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을 할 수가 없었죠."
[좡용밍]
"황민화운동에는 사실 단계가 있었어요. 우리가 그런 것도 이해를 해야 하는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소위 대만인 일본 병사 이야기를 하잖아요. 거기에는 단계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모병 방식을 사용했는데, 모방이라 하면, 대만인이 가서 종군하기를 격려하는 식이었죠. 심지어 일제 시대에 일본이 노래를 통해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고요. [달밤의 슬픔],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을 [영예의 군속]이나 [군속의 아내]인가로 바꾸고.
그러니까 대만인이 전장에 나아가서 군속이 되는 게 일종의 영광이라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들 아셔야 하는 게, 군속이라고 하면 당시 일본 군대의 체제 속에서 가장 낮은 계층이었단 거예요. 일본인들의 체제에서 제일 높은 지위는 군인들이었고, 그 다음 군마, 군견, 그 밑에 군속이 있었던 거죠."
30년대에 인기를 얻었던 이런 유행가요는 1941년 이후로 그 가사가 군국주의화되었지만, 노래의 생명은 여전히 이어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진주만 사건과 태평양 전쟁의 전면화에 따라 동아시아의 도시에는 대중 오락이 이미 사라지게 되었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불황이 시작되었고, 막 장년층에 접어든 대만의 음악인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미국 역시 대만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고, 방공 경보가 하늘까지 울려퍼지는 일이 잦게 되었다. 이 와중 폭탄 한 발이 콜롬비아 음반사에 떨어졌고, 전쟁의 참화로 인해 음반 산업은 십년 간의 풍부한 창작기를 뒤로 하고 점차 정지되었다.
"민국 34년(1945년) 10월 25일, 일본 대표는 타이페이의 중산당(中山堂)에서 투항 서명을 하였다. 이에 따라 본국은 대만과 펑후를 돌려받는다."
1945년, 전시에 애국 가요를 홍보하던 중산당은 일본이 투항 서명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일본의 50년에 걸친 통치도 끝이 났다.
"민국 34년 항전이 승리했고, 일본은 무조건 투항했습니다. 대만은 다시 한 번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만의 일본 교포와 일본 포로는 분분히 일본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을 길에서 팔거나 물물교환을 했고, 일본에 가져 갈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대만을 접수하는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을 당시, 규모가 다소 있었던 음반 산업은 일본인들이 떠남에 따라 잠시 진공 시기를 맞게 되었다.
[린량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상황이 심각했죠. 우리는 유행가는 만들어도 음반은 만들지 못했거든요. 그럼 어떡하냐, 그냥 못했던 거죠. 그래서 민국 34년, 즉 1945년부터 1950년 경에 이르는 이 시기에 대만에서는 음반이 만들어지지가 않았어요."
프레스 공장도, 온전한 녹음 기술도 없었고, 음반사는 전시에 문을 닫았었다. 가수와 작사가, 작곡가들은 분분히 흩어져 전업한 상태였다. 대만의 음반 산업은 이 때부터 암흑기에 들어서게 된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중간 광고]
[31:20]
[가사: 농촌곡(農村曲)]
"透早就出門
天色漸漸光
受苦無人問
行到田中央"
여러 해 동안 전쟁의 세례를 받으면서 민간 오락과 과학 기술, 공업은 발전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이에 대만의 1세대 음반업자들은 중고시장에서 옛날 앨범을 찾아가며 암흑 속에서 스스로의 유성기 기술을 모색해 나갔다.
[예진타이(葉進泰): 1세대 음반 제작자, 라이더(錸德) 과기회사 회장]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음반을 갖고 돌아가는 게 번거로운 일이 되기도 했죠. 그래서 얼마에 팔면 바로 얼마가 남고, 길가에서 팔고 그랬어요. 길가에선 잘 팔리진 않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전부 갖고 오는 거예요. 싼 가격으로 그 사람들한테 사서 그걸 원료로 하고, 그걸 원료로 음반을 프레스하는 겁니다. 그 재료를 이용하고 우리가 다시 프레스 기기를 써서 그 위를 누른 다음, 들어내면 바로 우리 노래가 되는 거죠."
일본인들이 음반 제조 기술을 대만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1세대 음반 제작자들)은 재래식 제강 방식을 사용해 대만 본토의 1세대 음반 제조 공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다 방치되었던 시기, 대만의 음반 산업은 다시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상하이와 홍콩의 오락 산업 역시 새로 부흥하고 있었다.
십리(十里)가 양장(洋場)이라 불렸던 상하이는 1920년대에 각국의 조계지였고, 서방의 영향 아래 저우쉬안(周璇), 바이광(白光), 리샹란(李香蘭) 등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수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노래에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고, 중국과 서양 음악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이런 노래가 소위 '상하이 시기의 황금 가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상하이의 밤(夜上海)]
"상하이의 밤, 상하이의 밤, 너는 불야성이구나
불이 밝혀지고, 음악 소리가 울리고, 춤과 노래로 평화롭구나"
대만의 1세대 대만어 가요 황금기는 전쟁의 발발 이후 마침표를 찍었다. 한편 중국은 일본에 맞서 8년간 항전했고, 이 가운데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영화와 음악 산업이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이동해 가게 되었다.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아 홍콩에서 뮤지컬 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주제곡은 영화 흥행 수입의 보증 수표가 되었고, 게다가 이는 홍콩 시기 중국어 가요의 주요 유래가 되기도 했다.
[린량저]
"[상하이의 밤] 또는 저우쉬안의 [님은 언제 다시 오실까요(何日君再來)]같은 상하이의 가요를 들으면 '중국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아요. 그런 게 없고, 그런 노래에선 독특한 분위기가 나죠. 굉장히 부드럽고 또 구슬픈 그런 분위기죠. 그런 분위기는 반대로 대만에는 없어요. 그런 분위기의 유행가는 전쟁 후에 대만에 들어왔고, 대만의 국어(중국어) 유행가요의 1세대 주류가 되었죠."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났다. 대만으로 후퇴해 온 관료, 민간인, 군인은 2백만 명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은 대만에서 몇 년간 머무른 뒤 중국 대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쩌면 영원히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가사: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요(等著你回來)]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이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나 대만에 온 사람들로서, 고향이 그리워도 향수를 달랠 길이 없었다. 이들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단수이 강가의 노천 찻집에 와 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좡용밍/대만 역사 문헌 학자]
"물론 중국 대륙이 함락되기 전에도 먼저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죠. 이 사람들은 비교적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대륙이 이미 함락되게 생겼으니 먼저 넘어온 거죠. 이 사람들은 헝양루/형양로(衡陽路) 그 구역에 왔어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소위 말하는 그 칠중천 노래 무대(七重天歌廳)에서 상하이식의 그런 소비생활을 대만에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거죠. "
"하지만 그런 소비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상인 계층, 즉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대륙에서 대만에 온 사람들 중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잉차오(영교/螢橋)의 단수이 강가에 가서 노래를 들었습니다."
[화면: 잉차오]
간단한 탁자와 의자만 갖다놓은 이 곳에서는 입장권을 팔지는 않았고, 차를 팔 뿐이었다. 차 한 잔에 5마오(毛)로, 값싸고 실속이 있었다. 해가 질 때마다 찻집이 집집마다 차를 마시며 노래를 들으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서 불리는 노래는 바로 상하이 시기의 유행가요였다. 노랫소리에 애교가 묻어나는 이런 음악이 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주었다.
[좡용밍]
"민국 40년대(1951~1960년)에 단수이에는 대만어 가수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찻집(茶座)도 생겨났습니다. 그 시기에 이르러 대만어 노래를 듣는 쪽과 중국어 노래를 듣는 쪽이 갈렸다고 할 수 있죠. 단수이에서 상류와 하류 이렇게 두 개의 구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 두 구역에서 두 종류의 소비자층이 각각 나타난 겁니다."
중국어, 대만어, 일본어... 다양한 유행가요가 전후의 대만에 위로를 가져와 주었다. 또한 대만어로 쓰인 가요는 대부분 노래와 말을 즉석에서 읊는 방식(走唱)으로 민간에 전래되었다. 전후 대만의 생활상을 반영한 작품도 남겨져 귀한 자산이 되었다.
[가사: 빈 술병 파세요(有酒矸通賣無)]
"有酒矸通賣無
歹銅仔舊錫 簿仔紙通賣無"
[좡용밍]
"왜 그 노래에서 '빈 술병을 사러 다니는' 이야기를 하느냐, 그 노래가 1947년 쓰여진 것 아닙니까. 38년의 [뜨거운 로우쫑(燒肉粽)]도 마찬가지고요. "물가가 하루하루 올라서/집안에는 부양해야 할 입이 이렇게 많은데" ([뜨거운 로우쫑]의 가사) 이런 가사는 상당히 사실적인 거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 당시의 물가 문제 전체가 이 노래에 반영되어 있는 거죠. 민국 34년에서 38년(1945~49년) 동안 물가가 8천 배가 올랐어요. 이 8천 배는 정부에서 말하는 거고 사실은 1만 배가 넘게 올랐어요."
[가사: 뜨거운 로우쫑]
"뜨거운 로우쫑 팔아요... 뜨거운 로우쫑 팔아요
나는 스스로를 슬퍼하고 스스로 한탄하는 불행한 사람이지만...
(부모님이) 나를 몇 해 공부하게 해 주셨네...""뜨거운 로우쫑 왔습니다! 선생님, 쫑즈 사실래요?" (* 로우쫑은 쫑즈의 일종)
"얼마죠?"
"2원짜리하고 3원짜리가 있어요."
"3원짜리 하나 줘요."
"감사합니다!"
[뜨거운 로우쫑]에는 민간의 소외 계층이 잘 드러나 있다.
[좡용밍]
"이런 노래가 일반 소시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반영하고 있는 거죠. 왜 당시 많은 좌파 젊은이들이 이런 노래를 즐겨 불렀는가, 그들은 소시민 계층 편에 서서 권익을 요구하고, 소시민들을 동정하기 때문이죠.
당시에 한 음악가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 도시로 와서 일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내 마음의 창을 연다면(阮若打開心內的門窗)]를 썼어요. 젊은이가 도시에 와서 이 거대한 도시에서 기운을 잃고 있으면 마음이 정말 답답할 텐데, 고향의 전원을 보고 미래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라며 노래를 쓴 거죠."
[가사: 내 마음의 창을 연다면]
"봄날이 오래 가진 않지만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괴로움도 사라지겠지"
이런 노래는 당시 일반 민중들의 삶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듣는 이들 스스로가 맡은 역할과도 닮아 있었다. 괴로움, 기대, 방황... 이렇게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가사: 내 마음의 창을 연다면]
"내 마음 속의 문을 연다면
다섯 빛깔의 봄 빛을 볼 수 있을 거야"
자금을 투자해 음반 판매를 하려는 회사가 없었기 때문에 창작자는 스스로 작은 악대를 조직해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현장 공연을 해야 했다. 인구에 회자될 대만어 노래 여러 곡이 민간에서 구전되어 가기 시작했다.
또한 읊으며 노래하는 走唱 문화를 정점에 올려 놓은 것은 [당신이 어서 돌아오길(望你早歸)]로 주목을 받은 대만어 작곡가 양산랑(楊三郎)이었다. 1950년대, 그는 자기가 쓴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작은 악대를 조직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 목적은 바로 애써 창작한 노래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1952년 그는 나카노(那卡諾), 바이밍화(白明華), 바이냐오셩(白鳥生) 등의 사람들과 함께 흑묘가무단을 조직했다. 세 명에서 다섯 명의 작은 조직이 나중에는 4, 50여 명으로 늘어서, 이들은 대만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가무단의 화려한 복장과 조명, 배경에 아름다운 노래에 각지에서 온 관중들이 매료되었다.
[바이밍화/흑묘가무단 여자 주인공 역]
"무대 상에서 입은 옷이에요. 이 사진은 무대에서 탱고를 추는 거고요. 관중석에 사람들이 꽉 찬 걸 보면 정말 좋았죠. 옆 자리까지 전부 다 사람들이 꽉 차서 서 있었어요. 앉는 자리도 꽉 찼고 거기다 다들 서 있고.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았죠. 사람들이 완전 들어차서, 무대 위 사람들끼리 매진이라고 하고... 그러니까 분위기 전체가 좋아졌죠. "밥 먹었어?" 이 한 마디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고 그랬다니까요."
흑묘가무단은 가무단 문화를 탄생시켰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공연을 신기해했고 양산랑의 작품도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요가 되었다. 노천 노래 무대로부터 정교한 가무단 공연까지, 중국어 및 대만어 가요는 공연 형식을 통해 창작의 생명력을 이어 갔다.
[뉴스 기자]
"미국 프라이드(Pride) 사령관은 수비 지역으로부터 자유중국으로 와 정식 방문을 행했습니다."
50년대,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및 해외 방어선 확장으로 인해 대만에 14.8억 달러에 달하는 금전적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는 대만 경제가 안정세로 접어들 수 있게 하는 관건이 되었다. 민중의 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자 오락활동에 대한 욕구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대중음악 산업의 다음 단계가 시작할 조건이 이미 성숙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간 광고]
[44:40]
공업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로부터, 과학 기술 상품은 생산량 증가로 인해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격 인하가 되어야 상품이 널리 보급된다는 것은 각계 산업의 기본 법칙이 되었다. 물론 유행음악 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성기와 음반이었고 반 세기 이후에는 라디오와 방송이었다.
라디오 방송은 일본 식민지기에 대만에 유입되었다. 당시 라디오는 여전히 사치품이었다. 국민당이 대만에 온 이후에는 민영 방송국이 개설되었고, 라디오의 보급에 따라 라디오 방송 역시 이 시기에 이르러 대중의 생활과 만나기 시작했다. 거리의 예술인들과 노래 무대의 가수들은 이런 중요한 매체를 그냥 놓칠 수 없었다. 창작자들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곡의 지명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갈수록 많은 노래가 등장했고 신인들은 발탁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송 멘트]
중광(中廣) 방송사는 새로운 형식으로 가창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청년 남녀들은 모두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아 다들 앞다투어 대회에 등록하고 목소리를 뽐냈습니다.
50년대부터 여러 방송사가 가창 대회를 빈번하게 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가요계에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청중은 라디오 앞을 지키고 서서 지지하는 참가자에게 응원을 보냈고, 결선이 열릴 때면 방송사는 대형 체육관을 빌려 라이브 방송을 내보냈다. 이를 통해 청중은 대회 과정을 바로 알 수 있었고, 뛰어난 참가자들은 가요계의 다음 스타가 되었다. 쩡르칭(鄭日清), 천펀란(陳芬蘭), 황시티엔(黃西田), 위티엔(余天) 등이 모두 이런 가창 대회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라디오 방송이 대만인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듣는 열정을 다시금 일깨워줬을 무렵, 그 외에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엔터테인먼트 매체가 있었다. 이는 마치 황금 열쇠처럼 가요계에 있어 새로운 매체의 문을 열어주었다.
[화면: 영화 뜨거운 로우쫑]
"아버지, 여동생을 다른 사람 집에 보내서 키우게 하실 거라던데요. 옆집 쩐쩐(真真)도 양녀인데 그 애 어머니가 매일 때리신다고 해요."
1955년, 영화는 이미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여러 영화사가 대만어 영화 제작에 투자하고 있었다. 1956, 57년 이 두 해에만 60편의 대만어 영화가 완성되었다. 그 중 대만어 유행가요를 영화 제목이나 영화 소재로 차용한 영화가 전체의 1/3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영화와 가요 사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사: 비 내리는 밤 피는 꽃]
"비 내리는 밤 피는 꽃이여,
비바람을 맞아 땅에 떨어지네...
보는 이 없는데 매일 원망하고 한탄하네
꽃이 져서 땅에 떨어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지"
과거의 유행가 여러 곡이 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영화와 음악, 양대 오락 산업이 결합하여 더 큰 시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이렇게 날개를 단 유행음악 산업에 과학 기술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48년, 더 세밀한 음질로 녹음할 수 있는 녹음 방법이 발명되었다. 음반은 78회전에서 33과 1/3회전으로 바뀌었다. 회전 속도가 바뀌면서 그 전에는 한 장의 음반에 두 곡만 담기던 것이 12곡이 담기게 되었다. 따라서 음반에 들어갈 내용이 급증하면서 음반사는 더 큰 수요를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지 고심하게 되었다. 유일한 방법은 바로 더 많은 노래를 녹음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든 가요계 창작자들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갑자기 급증하는 수요를 갑자기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려웠다.
전쟁 후 일본에 대한 향수가 보편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만-일본 혼혈 가요가 나타났다.
[린량저]
"혼혈 가요라 하면 일본에서 이미 유명했던 노래,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고아 아이의 소원(孤女的願望)], [황혼의 고향(黃昏的故鄉)], 이런 노래는 원래 다 일본 노래거든요. 거기다 대만어 가사를 붙이는 거죠. 이렇게 하면 첫째, 인세도 안 내도 되고-그 때 저작권이 없어서 그냥 바로 도용한 거죠- 거기다 밴드도 필요없었죠. 왜냐하면 일본에서 경음악을 녹음을 하니까, 반주는 이미 다 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다가 우리 대만인이 대만어 노래를 부르면 바로 되는 거죠. 이렇게 돈을 아꼈어요."
혼혈 가요가 인기를 얻으면서 음반 시장의 공급-수요 관계가 날로 안정되어 갔다. 산업도 활로를 찾아 갔고, 음반 시장에도 새로운 면모, 새로운 사운드, 새로운 음반이 여럿 나타났다.
또한 이 때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도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사운드로 전 세계 음악계가 들썩였다. 1955년, 미국에서는 흑인 블루스와 백인 컨트리 음악을 하는 젊은 가수가 한 명 등장했다.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그의 노래는 자극적이었고 그의 노래는 새롭고 감정이 풍부했다. 게다가 준수한 외모에, 독특한 스타일과 매력적인 공연까지. 미국에서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돌풍을 일으켰고, 청년 문화의 지표가 되었다.
[린량저]
"1950년쯤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등장했고, 그는 이 사회에, 그리고 가요계에 큰 충격을 가져왔죠. 엘비스는 스스로 가사와 곡을 썼을 뿐 아니라 그 노래를 스스로 부르기도 하고, 게다가 공연 역시 이전의 관습을 깬 것이었죠. 마이크 앞에서 얌전하게 노래 부르는 그런 게 아니라 신체 동작이 많았고, 입은 옷도 굉장히 밝고 화려한 옷이었고, 이런 점들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던 거죠."
엘비스의 성공은 일본에서 바로 카피되었고, 코바야시 아키라(小林旭)와 같은 스타가 등장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그도 준수한 얼굴을 하고 청춘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가창, 안무, 연기 등 각종 방면에서 뛰어났다. 수많은 젊은 일본 남녀들이 그의 매력에 빠졌다. 일본의 영향 아래 있는 대만 역시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잡게 되었다.
[린량저]
"대만에서는 다른 한 명이 또 나왔어요. 바로 원샤(文夏)였죠. 원샤는 스스로 작곡, 작사가 되고 공연까지 하는 그런 가수였는데요, 생긴 것도 잘생겼고요. 그 때 아마 20대 초반이었을 텐데, 미남이었고. 이런 슈퍼맨 급의 슈퍼스타가 등장하면서 가요계에 미친 영향이 꽤 컸죠. 그러니까 이게 '아이돌'의 등장인 겁니다."
[영화: 원샤]
"신사 여러분, 숙녀 여러분, 제가 바로 원샤입니다. 오늘 제 영화를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해요."
원샤와 같은 슈퍼스타급 아이돌은 어딜 가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모두 스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가 부른 [어머니도 몸 조심하세요(媽媽請你也保重)], [황혼의 고향], [열여덟 아가씨 (十八姑娘)]는 바로 히트했고, 그는 나아가 원샤 패밀리(文家班)를 조직해 콘서트를 열고, 앨범을 녹음하고, 그 외에도 11편의 대만어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타이페이여 안녕(再見台北)]
여성: 문 오빠, 언제 대만으로 돌아가요?
원샤: 방금 왔는데.
여성: 문 오빠, 샤오왕은 왜 오빠하고 같이 안 돌아왔어요?
원샤: 샤오왕은... 없어졌어. 오늘 나하고 샤오왕이 타이페이에 돌아오던 도중 신문에서 어떤 사람이 여자아이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여자아이를 찾으면 찾아 준 사람에게 50만 원을 준다는 거야.
[린량저]
"왜냐하면 원샤 같은 가수들은 노래로 유명해진 뒤에 영화 연기를 했고, 그 다음에 영화에서는 가수의 노래를 가지고 주제곡을 했거든요. 이런 방식으로 된 거죠. 그리고는, 영화를 각지의 극장에서 상영하는데, 원샤가 직접 아무 극장 무대에나 예고 없이 올라서, 그러면 사람들이 다 소리를 지르겠죠. 그리고는 밖에 있는 선전차가 선전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오늘 원샤가 어디에서 무대에 올랐으니까 와서 보라고. 그런데 이렇게 와서 볼 때 당연히 돈을 내야 되겠죠? 이 기회에 음반을 사 가지고 돌아가는 거예요."
원샤의 성공 경험을 통해 음반사는 가수를 아이돌로 만드는 게 상업적으로 큰 기회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원샤는 당시 젊은 시절을 보낸 대만인들에게 있어 청춘의 상징이다.
[영화: 타이페이여 안녕]
"여기까지 제 이야기였습니다.
샤오왕!"
"문 형! 어디 가요?"
"타이페이에 가지."
대만의 대중음악 산업은 마침내 무로부터 출발하여 방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고, 음반 산업은 위에서 아래까지 완전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업계 전체가 50년대 말에는 확실한 기초를 갖추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성기의 시대로부터 아이돌의 성공까지, 대만 대중음악은 0에서 출발하여 계속 생활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고, 이러한 과정이 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다. 1960년에 이르자 대만에는 117개의 음반사가 존재했고, 산업적 가치는 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오늘날 그 산업적 가치는 당시의 4백 배, 즉 4억 달러에 달한다. 또한 대만은 중화권 대중음악의 중심이 되었다.
대만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이 섬에 흘러들어왔고 또한 자신만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대중음악 산업 역시 1910년에서 1960년까지의 정초기를 거치며 다양한 스타일을 창조해 냈고, 적응성과 창조성을 가진 다원적 특성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아이돌이 어떤 모습을 하게 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노래의 생명이다.
[화면: 비 내리는 밤 피는 꽃(雨夜花)을 연주하는 장영교향악단(長榮交響樂團)]
대만인들의 삶과 함께 해 오며 한 세기를 함께 해 온 대중음악은 시대의 변화, 각기 다른 언어와 기억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 하나씩 전해져 가고 있다.
[화면: 덩리쥔(鄧麗君)의 雨夜花 / 1988년 일본어 버전]
[화면: 황야오밍(黃耀明)의 雨夜花 / 1993년 광동어 버전]
[화면: 양종웨이(楊宗緯)의 雨夜花 / 1998년 대만어 버전]
[화면: 춘춘(純純)의 雨夜花 / 1933년 오리지널 레코딩]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