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한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본 일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2018년에 세 도시에서 세 번 본 것으로 레토 극장관람은 끝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새해에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아트나인에서 GV가 있길래 그래도 유태오씨를 한 번은 직접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아트나인을 처음 가 봤는데 아담한 공간이었다. 비록 주변 동네(이수역 부근)는 낯설고 몸둘 바 찾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앳나인이 레토의 한국 배급사인 덕분에 처음 왔는데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극장과 그 옆 카페에도 영화 관련 홍보물과 장식이 많았다.




영화 시작 전에 허기를 달래기 위한 약간의 음식과 기대감 진정을 위한(?) 약간의 맥주를...

(극장은 음식 반입은 금지이지만 음료 또는 맥주 등은 반입 가능한 듯 하다. 요즘 보기 드물게 레드락 생맥을 파는 좋은 곳이었다)





영화를 한 번 다시 보고, '본 영화를 또 보는 데도 이런 재미가 있군!'이라 생각하던 중 스크린 또는 SNS상의 유태오씨가 아닌 실제 유태오씨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레토가 러시아에서 개봉했을 즈음 영화에 대한 기대감과 배우에 대한 호기심으로 유태오씨의 SNS를 열심히 탐독했었다. '처음으로 빅토르 초이를 연기한 배우'로서 스크린을 통해 본 것은 물론이다. 그런 분을 이렇게 2018년이 지나고 19년이 되어 직접 눈앞에서 보니 정말 여러 (좋은) 감정이 들었다.

동행인의 말에 의하면 '화법이 독일인 같다'는 유태오 씨(^^;) 독일인의 화법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중하게 말하고 잘 웃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극장을 나오는 길에 있던, 처음 보는 포스터.




극장을 나오는 길에는 이런 콜라보 아트워크도 전시되어 있었다.



GV 때 들었는데, 어제(1월 6일) 자로 레토가 국내 1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나는 초이에 대한 팬심, 그리고 마니악한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면이 크기 때문에 사실 빅토르 초이와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또는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을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사실 레토를 러시아에서 봤을 때는 (적어도 유태오씨 때문에라도) 국내에서 개봉하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좋아할지 의심이 들었는데, 이렇게 개봉관이 많고 사람들의 반응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영화를 한국에서 1만 명이 보았다니! 빅토르 초이와 러시아 음악도 한국에서 조금 더 활성화되는 장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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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다시 레토를 보았다.
국내 정식 개봉은 내년 1월 3일이지만 그 전 연말연시를 맞아 CGV 아트시네마에서 몇 차례 상영해 주는 모양이었다.
유태오씨가 GV도 했다는데 매진도 너무 금방 되고 일정도 맞지 않아 가지 못했다.





CGV 아트하우스에 걸려 있던 포스터.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상영되다니!



사실은 이미 두 번 극장에서 보았고 영화 중간 클립이나 관련 소식도 그간 온라인으로 틈틈이 봐왔기 때문에
이번엔 다소 귀찮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싶어서 한 번 더 봤다.
그런데 역시 다시 보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예전에도 좋았고 다시 봐도 좋았던 장면들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배우들의 연기와 엔딩 장면의 무게감에 압도되었고, 두 번째는 한국어 자막이 있어서 또다른 감각으로 볼 수 있었고, 세 번째는 장면장면이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친구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아무튼 이번에 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만...



빅토르 초이, 마이크 & 나타샤 나우멘코의 삼각관계

예전에는 영화의 이런저런 요소가 재밌긴 해도 삼각관계 자체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름대로의 소소한 긴장이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부인 나타샤에게 하는 수 없이 방을 비워주고 힘없이 걷는 마이크 나우멘코, 그렇게 방을 비우고 빅토르를 초대했지만 차이는(!) 나타샤, 나타샤보다는 자기 창작과 커리어가 우선인 빅토르의 연쇄적인 감정구조가 섬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태오 씨는 영화에 관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일반적인 삼각관계 구도와는 다르게 빅토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머지 두 사람이 빅토르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구도라고 했었다. 나타샤는 물론이고 마이크 역시 빅토르를 후배 뮤지션으로서 얼마나 아끼는지는 영화에 여러 번 드러난다.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와 빅토르 초이라는 실제 사람을 생각하면, 구체적인 인간적 면모를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가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항상 원하는 목표가 분명했던 사람이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레토에서도 나타샤를 대하는 빅토르의 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등장하는 마리안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빅토르 초이가 묻어나 있다.



마리안나 초이

빅토르 초이의 첫 부인이 되는 마리안나는 영화 후반에나 잠깐 등장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누구길래 마리안나 초이를 저렇게 생생하게 연기할 수 있단 말인지!

영화에 잠깐 나오듯, 마이크가 돈을 벌어오면 정확한 수입을 모르는 채 받은 돈으로 아이를 키우고 생활하는 나타샤와는 달리, 마리안나는 연상이고, 직접 남편의 공연을 잡아주고 수익구조도 결정하고,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한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도 그런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커리어를 우선시하는 빅토르도 그런 점에서 나타샤보다는 마리안나와 더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마리안나(1959-2005)와 빅토르(1962-1990)



녹음에 대한 이중적 태도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마이크 나우멘코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록 뮤지션들이 음반 녹음에 대하는 미묘한 태도도 흥미로웠다. 한국과 대만 등지의 '초기' 록 뮤지션들 역시 녹음보다는 공연을 우선했었고, 당시 여러 뛰어난 뮤지션들이 녹음은 불필요하다거나 까다롭다는 태도를 보였다(그리고는 그 후 녹음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부당한 손해를 보곤 했었다). 대중음악의 변방에서 서구의 록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공산국가에서건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참 많은 면이 닮아 있다.
레토에서도 녹음을 하자고 하니 마이크부터가 공연이 우선이지 않냐는 태도를 보이지만, 한편 어차피 공연이 우선이니 녹음 시설이 열악하더라도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조언을 빅토르에게 해 주기도 한다.
실제로는 다행히 두 사람 다 꽤 많은 녹음본을 남겼고, 덕분에 지금도 그들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빅토르 '초이'의 성

한국 사람들이 빅토르 초이에 대해 가장 궁금해할 만한 것은 한국계로서 어떻게 러시아에서 그토록 유명해졌을까 하는 것이지만, 레토에서는 인종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나타샤가 빅토르에게 성이 뭐냐고 물어보는 짧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자 '최'씨 성의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는 뜬금없는 러시아 성을 대면서 얼버무린다. 레토의 아이디어가 착상된 나타샤 나우멘코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처음에 초이를 만났을 때 '초이'가 사람의 성인 줄 모르고 예명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런 에피소드를 넣은 게 아닐까, 레닌그라드의 러시아인으로서 초이란 성이 꽤나 어색하게 받아들여졌고 누가 물어보면 '러시아인스러운' 성을 대며 얼버무리는 것이 고려인으로서의 빅토르 초이의 삶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장면은 정말 잠시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라 좀 아쉽기도 했다. 제작진이 인종이나 민족 문제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과 공무원들

레토의 장소적 배경인 레닌그라드 록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은 러시아 음악사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지닌 곳으로, 소련에서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세워진 라이브하우스라는 의의가 있다. 록 음악 자체를 적성음악으로 여겨 단속했던 1970년대와는 달리, 브레즈네프 집권기 후반에는 록의 확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니 관제 라이브하우스를 만들어주고 관리를 하자는 정책을 펴게 되고 그래서 소련 유일의 합법, 관제 라이브하우스 1981년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 탄생한다. 영화에 나오듯 KGB 및 검열자들이 공연 내용을 일일이 검열해서 사전 허가를 내 주어야 공연이 허가되었지만, 아무튼 이 곳을 통해 마이크 나우멘코, 빅토르 초이를 포함한 수많은 러시아 록의 스타들이 탄생한다.

레토에서는 단속의 주체인 소련 공무원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비중있게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특히 체크무늬 양복)은 공연 내용과 뮤지션들에 의외로 어느 정도 친화적이기도 하다. 소련 언더그라운드의 더 이른 시기를 다룬 또다른 영화 스틸랴기(Стиляги)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단속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중간자들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는 모르겠다.







레닌그라드 록 클럽(1981-1991)의 실제 모습.

빅토르 초이 역시 이곳에서 수많은 공연을 했었고, 다른 그룹의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기도 했다. 레토에 나오듯 라이브하우스에서는 밴드뿐 아니라 관객들의 신체동작 역시 엄격히 통제되었고 관객들은 공연을 클래식 공연 보듯 얌전히 앉아서 지켜봐야만 했다. 마지막 사진에서는 관객으로서의 빅토르, 마리안나 초이, 후일 키노의 멤버가 되는 티토프와 구리야노프(레토에선 아직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가 보인다.



덕후적인 디테일

마지막으로, 레토는 '이건 실제로 없던 일임'이라며 영화가 픽션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의외로 마니아들을 겨냥한 소소한 디테일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영화 후반부 홈 콘서트에서 마이크가 인터뷰를 하면서 '무대에 코끼리나 올리고 싶네요' 식의 농담을 하는데, 마이크는 아니지만 80년대 소련의 천재적 전위음악가이자 또다른 초이의 '선배'였던 세르게이 쿠료킨(Sergey Kuryokhin)이 실제로 무대에 코끼리를 올려 화제에 오르게 된다. 아마 쿠료킨의 이야기를 약간 응용해서 영화에 삽입한 것일 텐데, 중요하지는 않지만 팬들이나 즐거울 만한 그런 장면이 여럿 있다.





작년부터 온라인에서 이 영화 소식을 접하고 어떤 작품이 나올까 기대하고 기사를 찾아보고, 예고 클립을 보며 기대하고, 블라디보스톡, 부산, 또 서울 세 도시에서 각각 봤다. 영화로서의 비평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개인적으로는 올해의 영화라 할 만큼의 추억과 의미가 얽힌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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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었다."



1993년 러시아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처음 했다는 이 말은 러시아의 운명, 변화무쌍하고도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현실, 수많은 급진적인 개혁과 반복되는 퇴보의 주기를 상징하는 문장이 되어 버렸고,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지난 100여년 간 러시아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혁명과 개혁, 급진적인 변화, 그리고 이어지는 사회적 경직성과 변화의 포기일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가 정치사에 치우친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체제의 변화가 평범한 러시아인들의 삶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하면 다소나마 현실에 부합하는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직되고 획일적인 소련에서도 당국이 허락한 '공식 문화' 외에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와 반문화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었으며, 특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하에서 소규모로만 존재하던 록 음악문화가 80년대 이후 수면으로 부상하고 더 넓은 관객을 만나게 된다. 특히 80년대 중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과 맞물려 록 음악은 처음으로 전국적인 시장과 통로, 미디어와 만나게 되었으며, 서방과의 해빙 국면 속에서 일시적으로 국제적인 주목도 받게 된다. 소련의 여타 하위문화, 또 전세계 많은 지역의 대중음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록 역시 비합법적으로 또는 제한적으로 유통되던 영미권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러시아 특유의 선율 구조, 문학적인 러시아어 가사, 그리고 '자유 세계'의 대중음악에는 부재했던 소련의 정치적 맥락에 힘입어 1980년대 이후 러시아 록은 고유의 역사와 맥락을 가진 장르로 발전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짧고 빛나는 시기를 러시아 록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때 엄청난 인기를 얻은 소련 최초이자 최후의 록스타가 바로 고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밴드 키노(Kino)의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빅토르 최(초이)였다.



1962년생인 빅토르 초이는 인기의 절정에 다다른 1990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생전의 스타는 사후 하늘의 별이자 전설이 된다. 1980-90년대 러시아와 소련 각지의 청소년들이 황량한 공터에서 기타를 들고 초이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지금도 러시아인들이 그 시대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어떤 전형적인 장면이다. 그가 남긴 무대 위 모습과 노래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무언가가 되었고, 그는 지금까지도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문화 아이콘이다. 그런 만큼 영화화 시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미 너무 유명하고도 특징적인 캐릭터인 초이를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지난 해 "Leto/Лето" (러시아어로 '여름') 계획을 알리자 촬영 단계에서부터 관심이 쏟아졌다.





고골 센터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게다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Kirill Serebrennikov) 감독은 현재 러시아의 가장 문제적이고 주목받는 예술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스타 감독이자 프로듀서로 활약해 온 세레브렌니코프는 2012년 이후 모스크바의 극장 및 극예술단 고골 센터의 예술감독으로 일하면서 이곳을 러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전위예술 공간으로 성장시켰고, 고골 센터 소속 배우들은 10대 때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받으며 러시아의 다양한 전위적 예술활동을 이끌어 나가는 주역이자 창작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2010년대 초는 러시아의 문화정책이 급격한 보수주의로 선회한 시기이기도 하다. 2012년 극단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서구주의자인 블라디미르 메딘스키(Vladimir Medinsky)가 러시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정부가 노골적으로 성적 보수주의를 지향하게 되며 러시아의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은 창작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문화적 보수주의에 반대하고 성적 지향, 인종주의, 자유주의 등 다양한 이슈를 작품에서 배제하지 않았던 세레브렌니코프는 언젠가부터 당국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세레브렌니코프의 2016년 영화 스튜던트(Ученик)

감독과 당국의 갈등, 그리고 21세기 러시아의 종교적 보수주의를 등골이 서늘할 만큼 사실적이면서도 극예술적으로 담아냈다. 주인공인 젊은 교사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적 교육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해임당하게 되자 신발을 땅에 못박고(영화는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 곳은 내가 속하고 또 속해야 할 곳이며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절규한다. 이미 정부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감독이 고국에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작품으로 말한 것이 이 영화 아닐까 한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남아 생존하겠다는 이 '선언' 후의 차기작이 바로 빅토르 초이를 그린다고 알려진 "레토"였다. 그는 결국 촬영 도중인 작년 8월 고골 센터의 공금횡령 건으로 체포된 후,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정식 판결도 없이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고 일체의 외부와의 접촉과 통신이 차단되어 있다. 국내외의 문화계 인사들은 혐의는 핑계일 뿐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탄압이라 보고 있는데, 아직 사건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영화는 감독 없이 어찌어찌 완성되었고 악조건 속에서도 칸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감독의 출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 국내의 이 영화와 감독에 대한 여론은 개봉 전에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지만 다행히 현지에서 무사히 개봉했고, 러시아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의 평범한 시내 영화관에까지 상영될 수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이 말을 이제야 하게 되는데, 나는 지난 주말에 영화를 보러 블라디보스톡에 잠깐 다녀왔다. 한국에서도 올해 하반기 혹은 내년에 정식 수입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국 상영을 무작정 기다리기가 아쉬워 결국은 현지에 보러 다녀오고 만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6월 7일에 개봉했고, 한국을 포함해 20여개국에 수출 예정이라고 한다.








개봉한 지 고작 열흘 정도 되었고 또 일요일 낮이라 그런지, 아담한 크기의 극장이 거의 꽉 차 있었다.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트레일러




세레브렌니코프는 왜 빅토르 초이를 영화화하려 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레토"를 이해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 영화는 빅토르 초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에만 충실한 사전적 의미의 전기 영화는 아니다. 오늘날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그의 모습은 20대 중반 이후의 청년기 스타덤에서 온 것이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초이는 아직은 무명인 19세의 소년이다.

"레토"는 좁게 말하면 빅토르 초이, 20대 후반의 마이크 나우멘코(Mike Naumenko), 그리고 그의 부인 나타샤(Natasha Naumenko)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 있었던 삼각관계를 재현해 낸 로맨스 영화이다. 1981년 여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한적으로만 허용되던 언더그라운드 록 씬에서 이미 스타이던 마이크 나우멘코는 어린, 무명의 빅토르 초이를 만나게 되고 그의 음악적 재능에 놀라며 초이를 말하자면 키워주게 된다. 나우멘코의 집과 공연장을 드나들며 서방 뮤지션들의 음반을 추천받고 그의 무대에 따라 서던 빅토르 초이는 자연스럽게 부인 나타샤와 가까워지고 로맨스를 키워나간다.



또한 "레토"는 1980년대 초 레닌그라드의 뚜소브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뚜소브까(Tusovka)란 가치 및 취향을 공유하는 소규모 하위 공동체라는 뜻으로 1980년대 소련의 신조어였다. 특히 그 시대의 특징적 현상인 록 뮤지션과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을 지칭할 때 뚜소브까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1980년대 러시아 록이 지금도 주목받는 것은 빅토르 초이 같은 몇 명의 스타들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취향과 지향을 공유했던 친구이자 동료들의 끈끈함과 반체제적 공동체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토" 역시 개인의 영웅담이 아니라 뚜소브까들의 일상을 그린 영화다. 

그리고 이들을 연기한 것은 바로 고골 센터 소속 배우들이다. 주역인 빅토르 초이는 한국 배우 유태오가, 마이크 나우멘코는 2010년대 러시아 록 뮤지션 로만 빌릭(Roman Bilyk)이 연기했지만, 여성 주연 이리나 스타셴바움(Irina Stashenbaum)을 비롯해 그 외 많은 조역들은 고골 센터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동료들이다(고골 센터의 인스타그램 페이지에서 이들의 근황을 지켜볼 수 있다). 정부의 탄압 아래 놓여 있는 2018년 고골 센터의 반문화 공동체적 상황에서 1980년대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밝고 낭만적이다. 뮤지션들과 공연 내용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성가신 존재' 정도로 묘사되는 소련 관원들을 제외하면 영화에는 악역이나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없고, 심각한 갈등구조도 없다. 18세 관람가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키스를 제외하면 성적인 묘사나 과한 폭력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러시아 록은 앞서 말했듯 시대의 필연적인 요구로 인해 저항정신을 상징하게 되었지만, 사실 빅토르 초이를 포함해 이 시기 대표적인 뮤지션들은 대부분 소련의 권력구조와 국제정치 자체에는 무관심하거나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냈고, 가사는 직접적으로 정치나 어떤 '주의'를 이야기하는 대신 비유와 추상으로 가득했다. "레토" 역시 특정 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영화가 아니다.

초이가 90년대에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는 한국 학생운동의 맥락 때문인지 저항가수 또는 민중가수 비슷하게 알려진 적도 있는데, 소련 체제는 정치적 저항세력의 가능성을 그다지 남겨두지도 않았고, 하위문화의 향유자들이 소수의 정치 저항세력과 그렇게 가깝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반문화의 주역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현실의 검열과 제약에 맞서는 대신 그 빈 틈과 사각지대에서 자신들의 삶을 쌓아나가는 쪽에 가까웠다. 러시아의 어느 평론가는 "레토"의 주인공들이 억압에 저항하는 대신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의 낭만은 후반부에서 동료 펑크 뮤지션인 안드레이 파노프(Andrei Panov)의 초현실적인 무대로 이어지다가 갑작스럽게 마무리되며 애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영화가 끝날 무렵 빅토르 초이는 드디어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한 밴드 키노로 데뷔하는데, 영화의 배경이었던 1981년보다 조금 뒤의 일이다. 초이가 자작곡 "나무(Дерево)"를 부르고, 초이(1962-1990)와 마이크 나우멘코(1955-1991)의 생몰연도가 화면에 등장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삶의 에너지로 충만했던 영화가 갑자기 죽음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은 소련 반문화의 빛나는 시기가 초이와 나우멘코의 삶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일단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초이가 90년 수많은 의문을 남기며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얼마 가지 않아 소련은 해체된다. 그리고 러시아 록의 시대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휩쓸리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저항'의 대상이 불분명해졌고, 반문화의 지향점이 모호해졌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고 나니 서방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 역시 급격히 식어버리며 뮤지션들이 소련 외의 시장을 찾기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90년 이후 러시아의 국내 상황은 혼란 그 자체여서, 쇼 비지니스는 마약과 성 산업, 범죄의 온상이 되었고, 당국의 단속을 피해 친구의 아파트에 지인들을 모아놓고 공연하던, 80년대 후반에야 처음으로 상업적 유통을 맛봤던 소박한 록 뮤지션들이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마이크 나우멘코를 포함한 반문화의 여러 주역들은 소련 해체 후 급격한 사회적 혼란과 음악 산업의 변화 속에서 각종 질병, 우울증, 알코올 중독 등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고, 일부는 음악활동을 접고 서방으로 떠나 극히 평범한 러시아계 이민자의 삶을 살아갔다. 극중에서 시종일관 반쯤 행복하게 미친 모습으로 등장하던 펑크 록커 안드레이 파노프(1960-1998)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뚜소브까들의 영화 후반부 상상 속 장면이 희망에 차 있으면서도 애상적인 것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 않던 서구 대중문화의 풍부하고 충족적인 세계가 그들에게는 소련 해체 후에도 다른 세계의 일이었고, 한 시대를 빛낸 재능과 사람들이 불운한 환경 속에서 소진되거나 이른 끝을 맞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러시아 록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일담을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결코 '죽은' 것은 아니다. 러시아 록의 명맥은 록의 시대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는 지금에 와서도 꽤나 견실하게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90년대의 혼란을 견디고 살아남은 록 뮤지션들은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며 활발하게 공연하고 있고, 빅토르 초이를 가장 중요한 롤모델로 삼는 젬피라(Zemfira), 그리고 마이크 나우멘코의 배우 로만 빌릭을 비롯해 다음 세대 뮤지션들의 계보도 이어진다. 그러나 소련 해체를 전후로 장르의 역사가 큰 굴곡을 겪었다는 것도, 러시아 록이 아직 건재는 하지만 지금도 80년대를 추억하며 오랫동안 서서히 늙어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난 안다 – 내 나무가 한 주도 살 수 없으리란 걸,

난 안다 – 내 나무가 이 도시에서 죽으리란 걸,

하지만 내 시간 전부를 그와 함께한다.

다른 모든 일에는 싫증이 났다.

이 나무가 내 집인 듯 하다.

이 나무가 내 친구인 듯 하다.

나는 나무를 심었다.

나는 나무를 심었다.


난 안다 – 내일 어린아이가 내 나무를 꺾어버릴지 모른다는 걸,

난 안다 – 내 나무가 곧 나를 버리고 가리란 걸.

하지만 그가 있는 동안에는 항상 그와 함께이다.

그와 함께 기쁘고 그와 함께 괴로워한다.

이 나무가 내 세상인 듯 하다.

이 나무가 내 아들인 듯 하다.

나는 나무를 심었다.

나는 나무를 심었다."


빅토르 초이, "나무"




지난 6월 초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청받아 첫 선을 보였을 때, 영미권 영화평론가들 중에서는 영화의 의미를 묻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소련 하위문화의 맥락과 그 이후의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내비치는 그리움이 낯선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세레브렌니코프와 고골 센터의 배우들처럼 문화적 보수주의라는 바다 속에서 자신들의 섬을 지키려 애쓰는 이들에게 앞 세대 반문화의 역사를 곱씹는 일이 결코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레토"는 1980년대 소련 반문화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1980년대 소련 반문화를 기억하는 2010년대 러시아 반문화의 영화이기도 하다. 빅토르 초이와 '뚜소브까'들의 영화이면서 또한 2018년 세레브렌니코프와 고골 센터의 영화이기도 하다. 어쩌면 러시아의 거시적인 정치사는 수십년에 걸쳐 반복되고, 러시아인들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앞에 선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고, 가능한 방식으로 자유를 모색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2018년 모스크바의 고골 센터든 1980년대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든 말이다. 또한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은 현실이라는 벽과 다양한 층위의 제약 아래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자유를 추구하고 최선을 위해 노력한 이들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어 조금은 더 살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제작진들은 "레토"가 초이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지만(어쩌면 '고고학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한 발 물러섰을지도), 실제로 영화를 보니 꽤나 고증에 충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 유태오가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초이 역을 따 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닮지 않았는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바깥과 자신 사이의 벽을 의식하는, 내성적이고 소박한 19세의 빅토르 초이를 정말 잘 연기했다. 초이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대중에게 남성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초이가 80년대 후반 스타덤에 오를 때의 무대 위 캐릭터에 더 가까웠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한 사람으로서의 빅토르 초이는 록 스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이었던 것도 같다. 초이에 대한 비전통적이고 섬세한 해석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그리고 영화의 다양한 조연들은 대개 그 시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실존 유명인들인데, 언뜻 보기에도 인물의 특징을 너무나 잘 표현해 냈고 외모도 닮아서 여러 번 놀랐다. 영화 속 초이의 무대의상과 분장 역시 모두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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