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다시 레토를 보았다.
국내 정식 개봉은 내년 1월 3일이지만 그 전 연말연시를 맞아 CGV 아트시네마에서 몇 차례 상영해 주는 모양이었다.
유태오씨가 GV도 했다는데 매진도 너무 금방 되고 일정도 맞지 않아 가지 못했다.





CGV 아트하우스에 걸려 있던 포스터.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상영되다니!



사실은 이미 두 번 극장에서 보았고 영화 중간 클립이나 관련 소식도 그간 온라인으로 틈틈이 봐왔기 때문에
이번엔 다소 귀찮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싶어서 한 번 더 봤다.
그런데 역시 다시 보러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장면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예전에도 좋았고 다시 봐도 좋았던 장면들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배우들의 연기와 엔딩 장면의 무게감에 압도되었고, 두 번째는 한국어 자막이 있어서 또다른 감각으로 볼 수 있었고, 세 번째는 장면장면이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친구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

아무튼 이번에 보면서 재미있었던 것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만...



빅토르 초이, 마이크 & 나타샤 나우멘코의 삼각관계

예전에는 영화의 이런저런 요소가 재밌긴 해도 삼각관계 자체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나름대로의 소소한 긴장이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부인 나타샤에게 하는 수 없이 방을 비워주고 힘없이 걷는 마이크 나우멘코, 그렇게 방을 비우고 빅토르를 초대했지만 차이는(!) 나타샤, 나타샤보다는 자기 창작과 커리어가 우선인 빅토르의 연쇄적인 감정구조가 섬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태오 씨는 영화에 관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일반적인 삼각관계 구도와는 다르게 빅토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머지 두 사람이 빅토르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구도라고 했었다. 나타샤는 물론이고 마이크 역시 빅토르를 후배 뮤지션으로서 얼마나 아끼는지는 영화에 여러 번 드러난다.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와 빅토르 초이라는 실제 사람을 생각하면, 구체적인 인간적 면모를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가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항상 원하는 목표가 분명했던 사람이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레토에서도 나타샤를 대하는 빅토르의 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시 등장하는 마리안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빅토르 초이가 묻어나 있다.



마리안나 초이

빅토르 초이의 첫 부인이 되는 마리안나는 영화 후반에나 잠깐 등장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 누구길래 마리안나 초이를 저렇게 생생하게 연기할 수 있단 말인지!

영화에 잠깐 나오듯, 마이크가 돈을 벌어오면 정확한 수입을 모르는 채 받은 돈으로 아이를 키우고 생활하는 나타샤와는 달리, 마리안나는 연상이고, 직접 남편의 공연을 잡아주고 수익구조도 결정하고,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자청한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실제로도 그런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의 커리어를 우선시하는 빅토르도 그런 점에서 나타샤보다는 마리안나와 더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마리안나(1959-2005)와 빅토르(1962-1990)



녹음에 대한 이중적 태도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마이크 나우멘코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록 뮤지션들이 음반 녹음에 대하는 미묘한 태도도 흥미로웠다. 한국과 대만 등지의 '초기' 록 뮤지션들 역시 녹음보다는 공연을 우선했었고, 당시 여러 뛰어난 뮤지션들이 녹음은 불필요하다거나 까다롭다는 태도를 보였다(그리고는 그 후 녹음기록이 없다는 점 때문에 부당한 손해를 보곤 했었다). 대중음악의 변방에서 서구의 록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공산국가에서건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참 많은 면이 닮아 있다.
레토에서도 녹음을 하자고 하니 마이크부터가 공연이 우선이지 않냐는 태도를 보이지만, 한편 어차피 공연이 우선이니 녹음 시설이 열악하더라도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조언을 빅토르에게 해 주기도 한다.
실제로는 다행히 두 사람 다 꽤 많은 녹음본을 남겼고, 덕분에 지금도 그들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빅토르 '초이'의 성

한국 사람들이 빅토르 초이에 대해 가장 궁금해할 만한 것은 한국계로서 어떻게 러시아에서 그토록 유명해졌을까 하는 것이지만, 레토에서는 인종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나타샤가 빅토르에게 성이 뭐냐고 물어보는 짧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러자 '최'씨 성의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는 뜬금없는 러시아 성을 대면서 얼버무린다. 레토의 아이디어가 착상된 나타샤 나우멘코의 회고록을 읽어 보면, 처음에 초이를 만났을 때 '초이'가 사람의 성인 줄 모르고 예명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런 에피소드를 넣은 게 아닐까, 레닌그라드의 러시아인으로서 초이란 성이 꽤나 어색하게 받아들여졌고 누가 물어보면 '러시아인스러운' 성을 대며 얼버무리는 것이 고려인으로서의 빅토르 초이의 삶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장면은 정말 잠시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라 좀 아쉽기도 했다. 제작진이 인종이나 민족 문제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과 공무원들

레토의 장소적 배경인 레닌그라드 록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은 러시아 음악사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지닌 곳으로, 소련에서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세워진 라이브하우스라는 의의가 있다. 록 음악 자체를 적성음악으로 여겨 단속했던 1970년대와는 달리, 브레즈네프 집권기 후반에는 록의 확산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니 관제 라이브하우스를 만들어주고 관리를 하자는 정책을 펴게 되고 그래서 소련 유일의 합법, 관제 라이브하우스 1981년 레닌그라드 록 클럽이 탄생한다. 영화에 나오듯 KGB 및 검열자들이 공연 내용을 일일이 검열해서 사전 허가를 내 주어야 공연이 허가되었지만, 아무튼 이 곳을 통해 마이크 나우멘코, 빅토르 초이를 포함한 수많은 러시아 록의 스타들이 탄생한다.

레토에서는 단속의 주체인 소련 공무원들(...)의 모습도 어느 정도 비중있게 들어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특히 체크무늬 양복)은 공연 내용과 뮤지션들에 의외로 어느 정도 친화적이기도 하다. 소련 언더그라운드의 더 이른 시기를 다룬 또다른 영화 스틸랴기(Стиляги)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단속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중간자들이 실제로 얼마나 있었는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는 모르겠다.







레닌그라드 록 클럽(1981-1991)의 실제 모습.

빅토르 초이 역시 이곳에서 수많은 공연을 했었고, 다른 그룹의 공연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기도 했다. 레토에 나오듯 라이브하우스에서는 밴드뿐 아니라 관객들의 신체동작 역시 엄격히 통제되었고 관객들은 공연을 클래식 공연 보듯 얌전히 앉아서 지켜봐야만 했다. 마지막 사진에서는 관객으로서의 빅토르, 마리안나 초이, 후일 키노의 멤버가 되는 티토프와 구리야노프(레토에선 아직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가 보인다.



덕후적인 디테일

마지막으로, 레토는 '이건 실제로 없던 일임'이라며 영화가 픽션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의외로 마니아들을 겨냥한 소소한 디테일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영화 후반부 홈 콘서트에서 마이크가 인터뷰를 하면서 '무대에 코끼리나 올리고 싶네요' 식의 농담을 하는데, 마이크는 아니지만 80년대 소련의 천재적 전위음악가이자 또다른 초이의 '선배'였던 세르게이 쿠료킨(Sergey Kuryokhin)이 실제로 무대에 코끼리를 올려 화제에 오르게 된다. 아마 쿠료킨의 이야기를 약간 응용해서 영화에 삽입한 것일 텐데, 중요하지는 않지만 팬들이나 즐거울 만한 그런 장면이 여럿 있다.





작년부터 온라인에서 이 영화 소식을 접하고 어떤 작품이 나올까 기대하고 기사를 찾아보고, 예고 클립을 보며 기대하고, 블라디보스톡, 부산, 또 서울 세 도시에서 각각 봤다. 영화로서의 비평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개인적으로는 올해의 영화라 할 만큼의 추억과 의미가 얽힌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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