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궁금증과 기대에 이 포스팅을 쓴 지도 어느새 일 년이 되어갑니다. 시간이 흘러 이번 달에는 러시아 현지에서 드디어 영화가 개봉했고, 오랜 설렘 끝에 지난 주 블라디보스톡에 잠시 들러 영화를 보고 와서 리뷰를 썼습니다. 영화의 문화적 배경과 그 저변의 시대정신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글이길 바라며 썼네요 :)

http://daskraftwerk.tistory.com/172



어제 뜬 놀라운 기사 하나를 공유하고자 한다. 아래는 오마이뉴스의 기사 전문.

(원문 링크 페이지는 신문사 페이지답게 광고가 너무 많아서, 저 개인이 읽기 위해서라도 옮겨 둡니다)


'가택 구금' 당한 러시아 감독 곁에 한국배우 있었다

[인터뷰] 빅토르 최 연기하는 배우 유태오, 러시아서 현지 소식 전해 "작품 꼭 완성시킨다"


최근 AP통신 등 외신에서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의 가택 구금 소식을 전했다. 혐의는 정부 지원금 횡령 의혹이다.

 

세레브네리코프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주요 부문 수상은 물론이고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르면서 명성을 쌓고 있다. 그런 그가 자국에서 그것도 영화 촬영 중 자택에 강제 구금당했다는 소식은 세계 관객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횡령 역시 사실과 다르며 그간 체제 비판적 영화를 찍은 것에 대한 일종의 길들이기라 보는 시각이 강해, 현지에선 석방 요구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이 촬영 중인 영화엔 한국인 배우가 등장한다. <썸머>(Summer)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중심인물이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러시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다. 빅토르 최는 구소련 시절 국가와 체제의 억압을 조롱하며 시대를 풍미한 록스타로 현지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인물. 배우 유태오가 2000 1의 오디션을 뚫고 빅토르 최를 맡아 연기 중이었다.

 

관계자를 통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는 유태오와 연락이 닿았다. 현재 영화 제작사는 감독 없이 촬영을 진행해서 크랭크업 일정(9 3)에 맞춘다는 계획이다. 다행히 시나리오와 촬영 노트가 있고, 배우들 또한 리허설을 한 부분이라 문제없이 마무리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감독은 지난 8 22일 화요일 새벽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한 호텔에서 연행된 후 현재까지 구금 중이다. 아래는 배우 유태오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존경받는 감독


- 현지 상황부터 설명 부탁드린다. 감독 없이 촬영하는데 분위기가 어떤지.

"감독님 연행 후 3일 간 상황을 지켜봤다. 자택 구금 이후 배우들과 스태프, 제작자가 회의했고 감독님 없이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8 25일 새벽(현지시간 기준)부터 촬영 중이다. 남은 5회 차를 8 31일까지 찍고, 마지막 회차는 감독님의 상황을 보고 (결정)할 것 같다. 그래도 중요한 분량은 촬영해놔서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 감독님과 리허설을 했고, 연출 메모 등을 참고해서 찍고 있다. 감독님 없이 촬영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열심히 찍고 있다."

 

- 구금 중인 감독과 전혀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인 건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넷도 못하시고 주위 사람들도 연락을 못하고 있다. 변호사를 통해 그나마 근황을 듣는 정도다."

 

- 현지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어떤 상태인가.

"감독님 연행 후 모두 모여 단합했다. 여기 배우들이 나보고 고맙다고 하더라. 다른 나라에 와서 러시아어로 빅토르 최를 연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같이 힘을 합쳐 나가자고 해서 그런 것 같다. 어려운 상황에 다 같이 뭉치는 분위기다. 제작자도 어찌 됐건 이 영화를 꼭 완성시키려고 한다. 배우들과 제작자가 감독님을 무척 존경한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끈끈한 연대감이 형성된 것 같다."

 

- 현지에서 존경을 많이 받는 감독인 걸로 알고 있다. 그곳 영화계나 사회적으로 감독님이 어떤 존재인지.

"감독님은 고골센터라는 현대 연극 극장의 디렉터다. 러시아에 와서 감독님이 연출하신 연극을 한편 봤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나도 런던에서 셰익스피어를 공부하면서 많은 연극을  봤지만 키릴 감독님 연극은 정말 신선하고 현대적이었다. 고골센터에선 배우들이 청소년 때부터 연극을 시작한다. 지금 유명한 배우들도 대부분 청소년기에 감독님을 만나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래서 감독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배우들이 많다.

 

2016년 칸 영화제와 로카르노 영화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수상한 저력이 있는 분이다. 또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그것을 위해 앞장선다. 그래서 이번에도 재판장 앞에 영화계, 문화계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시위했다. 2만 명 정도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00 1


유태오는 1981년 독일 출생으로 뉴욕과 런던 유학 후 현재는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미국과 베트남 독립영화 출연 경험이 있고 최근작 <디비 첼로>라는 작품에선 아티스트 백남준 역을 맡아 2017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를 찾기도 했다.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후 합류한 <썸머>를 위해 그는 지난 7월 러시아에 미리 와 빅토르 최의 밴드 '키노' 옛 멤버들을 만나며 작품을 준비 중이었다.

 

- 영화 합류 과정이 궁금하다. 또 이번 영화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감독님이 꼭 한국인을 캐스팅 하고 싶어 했다. 고려인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내 한국인의 오디션을 보셨다고 들었다. (여의치 않자) 나중엔 범위를 넓혀서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 중국인 교포까지 만나셨더라. 2000명 정도라고 한다.

 

나는 내 사진과 함께 자작곡을 기타 치며 부르는 영상을 찍어 보냈다. 일주일 후 모스크바로 와줄 수 있냐 연락을 받았고, 거기서 감독님을 만난 후 출연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촬영 한 달 전 러시아 스피치 선생과 매일 러시아를 배웠다. 추후 더빙이었지만 입모양을 맞추려면 모든 대사와 노래를 러시아어로 다 외워야 했다. 숙소 방에 러시아어 대사를 붙여놓고 연습했다. 암기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웃음). 독일어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러시아어는 정말 어렵더라. 게다가 감정을 살리며 연기를 해야 했다. 정말 힘든 과정이었는데 그만큼 많은 걸 배웠다."

 

- 빅토르 최에 대해 좀 알고 있었는지.

"음악을 좋아해서 원래 알고 있었고,  멋있는 가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2세라 외국 땅에서 사는 한국인의 감수성을 잘 안다. 빅토르의 노래에서 그런 게 읽혔다. 영화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빅토르에 대해 연구했다. 논문으로 써도 될 만큼이다. 근데 그 자료보다 중요한 건 준비하면서 빅토르 최의 감수성을 느꼈다는 게 더 큰 수확이다. 나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외모적으로 내가 그를 닮지 않았음에도 감독님이 왜 날 택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에서 정말 유명한 영웅이다. 실존 인물을 연기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부담은 크지만 이런 기회가 온 것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배우로서 행운인 거 같다. 예전에 베트남, 태국, 중국 영화에 출연했었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현지 영화를 찍는다는 게 힘들지만 유태오만의 독자적인 커리어를 쌓는 것 같아 보람 있다. 이번 영화 촬영장에 빅토르가 사랑했던 실제 여성분이 오셨다. 내 촬영을 보시더니 빅토르와 영혼이 똑같다고 하시더라. '이제 됐구나!' 싶었다."

 

- 감독은 왜 이번에 빅토르 최를 그리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감독님이 직접 답해야 할 것 같다)"

 

- 영화 제목이 <썸머>인 이유는?

"빅토르가 데뷔하기 직전 첫 앨범을 준비하고 있던 청년 시절이 배경이다. 그때 한여름에 있었던 사랑이야기와 데뷔하게 된 사연이 영화의 줄거리다. 그래서 제목이 썸머다."

 

- 개봉 시기가 정해졌는지. 크랭크업을 앞둔 배우 본인의 각오는?

"내년 하반기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에도 수입되어서 개봉하면 좋겠다. 일단 촬영이 잘 끝나길 바라고, 주인공이라 그런지 스태프들과 함께 이 상황을 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다. 이번 일로 역사의 한 부분을 지나는 기분이다.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감독님 연행 후 혼자 빅토르 최 무덤을 찾았다. 그가 이 영화를 지켜주고 동시에 이 영화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한편 유태오 관계자는 감독의 구금에 대해 "보통 횡령 혐의가 있다고 해서 자택에 구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라고 전했다.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의 구금 사유는 고골 센터 극장 운영 자금의 횡령 혐의다.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의 전작은 <스튜던트>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어 당국에서도 주시했다는 후문. 이 작품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초청작이기도 했다. 오는 10 19일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에 대한 2차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실 며칠 전에 러시아 웹에서 이 유태오 씨가 빅토르 초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에는 자세한 내용도 나와 있지 않고 예상과 너무 다른 이야기라 기사를 보면서도 오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빅토르 초이의 활동 전후를 그리는 영화가 현재 세 편 제작되고 있다. 

이 중 한 편은 80년대 초이의 밴드 멤버였던 알렉세이 르빈(Алексей Рыбин)이 감독으로 촬영 중인 영화인데, 여기에서 초이를 맡은 주연이 '한국계'와 인연 없는 사람(추측)가 선정되었다. 반대로 세레브렌니코프는 혼혈이나 고려인도 아닌 한국 배우를 채용했다는 것이다.


르빈 감독의 빅토르 전기 영화에 출연하게 될 다니스 부하라예프(Данис Бухараев).


이 사람도 슬라브인은 아닐 수 있긴 한데(예전부터 다양한 아시아계 소수민족이 살아온 러시아의 특성상 아시아계/유럽계를 물 가르듯 나누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한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부하라예프의 관련 인터뷰는 현재 웹에서 찾지 못했다.

외모적으로는 닮은 느낌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초이와 외모가 완벽히 닮은 사람만을 고집한다면 아예 영화를 찍기가 어렵겠지만, 아무튼 대중으로서는 '빅토르 초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초이 전기 영화에서는 오른쪽의 유태오 씨가 주역을 맡았다.


유태오 씨는 한국계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싶은데,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한인 2세로서, 지금은 주로 한국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위의 기사에 밑줄을 쳐 둔 대로, 유태오 씨가 초이 역할에 발탁된 것은 한국계라는 점을 고려한 결과로, 세레브렌니코프는 처음부터 고려인이나 한국계를 초이 역할로 발탁하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 유태오 씨는 이 영화 이전엔 러시아와 인연이 별로 없었던 듯 하고, 노어도 전혀 못했다고 하고, 게다가 이미지가 초이와 많이 다르다(적어도 내가 처음 받은 느낌은 그랬다)... 그래서 러시아 기사(별다른 정보가 없는 단신이었음)를 보면서도 너무 의외여서 오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빅토르 초이라는 '텍스트'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이냐는 문제인 것 같다. 80년대 초반 초이와 음악활동을 함께 했던 동료인 르빈에게 있어서는 아마 초이가 '한국계'라는 게 중요하지 않지 않았을까? 좀 아시아인처럼 생긴 동료, 정도라 생각하지 않았을지. 그렇기에 초이의 인종적 특성을 딱히 고려하지 않은 다른 러시아인 배우를 선택했을 것 같다.

반면 세레브렌니코프는 처음부터 고려인/한국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한국 배우(한국계 독일인이긴 하지만, 한국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한국 배우라고 해도 심한 왜곡은 아닐 것 같다)를 채용했다. 세레브렌니코프는 초이에게서 무엇을 읽어내려 했을까? 대체 어떤 영화를 찍으려고 한 걸까?



위의 트윗은 80년대 소비에트 록에 대해 많은 기록과 평론을 남겼으며 초이를 '발탁'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던 음악평론가 아르테미 트로이츠키(Артемий Троицкий)가 방금 막 올린 글인데, 이 영화 <여름(Лето)> 일부를 보았으며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는 감상평이다.

기사에 나왔듯, 지금 문화탄압으로 여겨지는 가택연금 사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거의 촬영을 마쳤으며 크랭크업도 며칠 안에 될 것이고, 18년 말에 상영 예정이라고 한다.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재능과 명성이라면 대단한 영화가 나올 거라는 희망을 가져도 좋긴 할 텐데, 아무튼 만들기 전부터 여러 논란도 있었고, 감독의 상황도 상황이고, 주연 배우도 사실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워서, 참 기다리기가 어려운 작품이다. 빅토르 최라는 텍스트, 그리고 빛나는 재능의 세레브렌니코프 감독, 그리고 유태오 씨라는 (나에게는) 미지의 한인 배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래는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본인 페북에 올린 <여름> 촬영 현장의 사진. (참고로 유태오 씨의 모습은 공개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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